오프라인 기업은 로컬에서 탈산업화 사회가 요구하는 창조자원을 찾는다. 탈산업화 사회는 개성으로 경쟁하는 시대다. 1970년대 이후 선진국은 모두 조직력, 효율성, 물질적 성장을 강조하는 물질주의 사회에서 개성, 다양성, 삶의 질을 중시하는 탈물질주의 사회로 전환했다. 한국의 탈물질주의도 2010년대 이후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했다. 탈물질주의 사회에서 개인, 기업, 도시, 국가가 경쟁력을 갖추려면 정체성과 차별성을 갖춰야 한다. 창업에 있어 우선순위는 특이성(Singularity)과 유일함(Uniqueness)이며 기업의 경쟁력은 다른 기업이 복제할 수 없는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정체성에 대한 욕구가 유난히 강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자신에게 충실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정체성은 지역과 국가의 문제기도 하다. 밀레니얼 세대들이 여행을 가서 에어비앤비에 머무는 건, 현지인들과 같은 경험을 하고 싶어서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문화를 원한다. 복제할 수 없는 경험과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지역과 국가는 일차적으로 관광객을, 이차적으로 다양성을 중시하는 창조인재를 유치하기 어렵다.
탈산업화라는 도전에 직면한 한국의 과제는 명확하다. 미래 세대와 국제 경제 환경이 요구하는 개성과 다양성을 산업과 일자리에서 구현해야 한다. 이를 실현하려면 ‘다름’이란 자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서 로컬만큼 다름의 소재를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는 자원은 없다.
선진국은 이미 다름을 지역산업의 소재로 활용한다. 밀레니얼이 열광하는 글로벌 브랜드인 스타벅스, 나이키, 이케아는 출신 지역의 생활문화를 비즈니스 모델로 활용해 창업한 경우다. 커피 도시 시애틀이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인 스타벅스를, 아웃도어 도시 포틀랜드가 나이키를, 실용주의 도시 알름훌트가 실용주의 브랜드인 이케아를 배출한 것이다.
우리는 대개 한국의 지역문화가 획일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생각을 바꿔야 한다. 지난 60년간 이어진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지역문화를 의도적으로 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환경의 차이에서 파생된 생활 문화의 차이를 씻어내지는 못했다. 지역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중앙문화의 표피 속에 숨어 있는 지역성을 쉽게 발굴할 수 있다.
지역성을 지닌 문화, 역사, 자연, 환경, 지리, 장소, 건축물 등이 로컬 비즈니스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지역에서 이미 산업화된 제조업, 서비스, 소상공인들 역시 지역성을 발굴할 수 있는 자원이다. 로컬 크리에이터들은 지역에 있는 자원들을 연결해 새로운 로컬 비즈니스 모델을 개척하는데 이들이 주목하는 자원은 ‘소상공인 장인’이다. 로컬 크리에이터들은 제주 전통공예 장인, 서울 을지로 소공인, 대구 북성로 공구 기술자, 광주 충장동 소상공인과 콜라보해 기존 제품을 리브랜딩 하거나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한다.
지역에 대한 밀레니얼 세대의 생각을 보면, 한국에서 로컬의 미래가 밝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로컬을 시골이나 지방, 변두리로 취급하지 않는다. 혁신이 일어날 수 있고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실현할 수 있는 장소로 여긴다. 미래 세대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열망이 강하며 로컬에서 그 일을 찾는다. 로컬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알맞은 공간이다.
실제로 전국 각지에서 밀레니얼 세대가 창업한 기업들이 지역문화와 경제를 혁신하고 있다. 로컬 콘텐츠 편집숍으로 농촌에 새로운 콘텐츠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제주 안덕면 사계생활, 커뮤니티 기반 복합문화공간으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응하는 서울 연남동 어반플레이, 서핑 리조트로 한적한 해변가에 연 수십만 명의 서퍼를 유치하는 강원 양양 서피비치, 제주에서 다양한 놀이 콘텐츠를 개발하는 제주 성산 플레이스캠프제주, 강릉과 광주에서 지역 농산물로 수제 맥주를 생산하는 버드나무브루어리와 무등산브루어리가 대표적이다.
2019년 중소벤처기업부는 지역문제를 해결하고 로컬 문화와 가치를 창조하는 로컬 크리에이터를 독립적인 산업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지역인재들이 수도권으로 이주하고, 지역에 잔류해도 공무원이나 공공 영역에서 기회를 찾는 분위기에서 창업과 혁신을 통해 밀레니얼 세대가 선호하는 일자리와 산업을 창출하는 로컬 크리에이터가 주목받는 현상은 분명 한국 경제에 반가운 소식이다.
로컬 크리에이터를 육성하지 않고 지역을 현 상태로 방치하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한 지자체장은 방관자 양산이 지역 불균형의 가장 큰 폐해라고 설명한다. “현재 지역 상황은 적어도 한국 국민의 50%를 방관자로 만든다. 국민 다수가 수도권만이 성장 창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다 보니 인구의 50%에 달하는 비수도권 국민은 성장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 기존 산업을 혁신하는 일, 그리고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일조차 중앙의 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로컬 크리에이터 부상의 배경에는 가치관의 변화와 기술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로컬 크리에이터를 찾는 소비자는 감성, 경험, 개성, 다양성 등 탈물질적 가치를 중시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중심의 대기업보다는 소비자 각각의 취향을 맞출 수 있는 로컬 크리에이터에게 유리한 소비 행태다.
기술 측면에서 보면 SNS가 생활화되면서 로컬 크리에이터가 위치와 규모에 관계없이 많은 고객을 유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지역문화를 창조하는 로컬 크리에이터의 주요 활동무대는 서울과 각 지역 원도심의 골목상권이다. 홍대·합정동, 연남동·연희동, 가로수길, 삼청동·안국동 등 과거 조용한 주택지였던 동네가 맛집 중심지로 부상했다.
로컬 크리에이터 효과는 상권에 그치지 않는다. 동네와 지역을 브랜드로, 창조도시로 만든다. 골목상권이 들어서면 주변 동네가 브랜드가 되고, 동네가 브랜드가 되면 창조인재가 들어온다. 연남동, 상수동, 합정동, 망원동, 후암동, 해방촌, 성수동, 왕십리, 뚝섬 등이 골목상권을 기반으로 ‘사람과 돈이 모이는’ 브랜드로 성장한 동네다. 이곳에는 음식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곳곳에 코워킹, 코리빙, 건축·디자인 사무소, 복합문화공간, 공방, 독립서점, 예술가 스튜디오 등 크리에이티브 공간이 가득하다. 소비의 공간이었던 골목상권이 스타트업, 소상공인, 예술가가 집적된 한국형 창조도시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뿐이 아니다. 지방에서도 로컬 크리에이터가 지역경제를 선도하고 있다. 로컬 크리에이터의 활약에 힘입어 광주 동명동·양림동, 수원 행궁동, 강릉 명주동, 전주 풍남동, 대구 삼덕동이 지역을 대표하는 골목상권으로, 제주 화장품, 강릉 커피, 양양 서핑산업이 지역의 특색을 활용한 지역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로컬 크리에이터의 활약으로 골목상권은 오프라인 시장에서 유일하게 성장하는 산업이 됐다. 2000년대 중반 홍대, 삼청동, 가로수길, 이태원 등 4곳에서 시작된 골목상권은 2020년 12월 기준 총 155곳으로 늘어났다. 대도시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155곳 중 소도시에 들어선 골목상권이 58곳에 이른다.
상권 간 경쟁도 시작됐다. 2012년 이후 서울 상권별 맛집 수를 보면 판도가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017년에 1위와 2위를 차지한 홍대앞과 이태원은 2021년에도 순위를 지켰지만, 익선동(3위), 을지로(6위), 성수동(7위), 약수동(12위)은 2017년보다 맛집 수를 크게 늘렸다. 언론이 꾸준히 핫플레이스로 주목한 상권 중심으로 맛집 수가 증가한 것이다. 언론이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으로 지적한 압구정동, 가로수길, 삼청동의 순위는 예상대로 하락했다.
로컬 크리에이터의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로컬 크리에이터 산업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로컬 크리에이터를 포함한 혁신적인 소상공인의 잠재력을 인식하지 못한 채 소상공인 전체를 구조조정 대상으로 접근하면 이들이 제공하는 지역발전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미래 경제 관점에서도 소상공인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프리랜서, 디지털 노마드 등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직업과 일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도 전통적인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대기업보다는 개인의 창의성과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소상공인 영역의 로컬 크리에이터 창업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앞서가는 나라가 미국이다. 캐나다 어카운팅 소프트웨어 기업 프레시북스(Fresh Books)는 ‘2018년 자영업 보고서(2018 Annual Self-Employment in America Report)’에서 2020년 미국에서 독립적인 고객 서비스가 주된 소득원인 프리랜서가 총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3%(총 고용인 1억 2,600만 명 중 4,200만 명)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의 비정규직은 2005년 총고용의 10.0%에서 2015년으로 15.8%로 이미 크게 늘어났다. 일의 의미와 형태가 변화하면서 전통적인 정규직이 사라지고 오늘날 미국 노동자의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 독립 노동자, 대안 노동자를 포함한 실질적인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는 또한 전 세대인 베이비부머, X세대와 달리 적극적으로 스몰 비즈니스를 창업한다. 2017년 미국 CGK연구소(Center for Generational Kinetics)의 조사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 중 창업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비중이 30%로 베이비부머의 19%, X세대의 22%를 크게 웃돈다. 44%의 밀레니얼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고 답변한 반면, 다른 세대는 18%만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밀레니얼이 선호하는 창업 장소는 도시였다. 밀레니얼의 61%가 도시에서, 32%가 교외에서 창업하길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밀레니얼의 창업 수요를 고려할 때 정부는 양면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시장에서 진행되는 자영업 구조조정을 수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상공인 인재 육성과 퇴출 사업자의 재훈련을 통해 사업자 전반의 경영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로컬 크리에이터 인재의 체계적 육성이 중요하다. 소상공인 인재 육성 시스템의 부재로 이들이 외국에 가거나 기존 장인 밑에서 비공식적으로 훈련받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
공간 기반 창업자를 위한 공간 기획, 커뮤니티 기획, 콘텐츠 개발 교육이 중요하다. 현재 골목상권에서 성공하는 많은 로컬 크리에이터 중 다수가 건축, 디자인, 콘텐츠 분야의 교육을 받았거나 문화기획 분야에서 현장 경험을 쌓은 사업자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감성과 체험을 중시하는 소비자의 니즈에 대응해 감각 있고 차별적인 공간과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업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
한 지역에 집적된 로컬 크리에이터 커뮤니티는 자생적인 지역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로컬 크리에이터들은 공통적으로 커뮤니티와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라이프스타일과 대안적 접근으로 배움의 커뮤니티를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현재 대부분의 지역에서 취향 공동체에 머물러 있는 로컬 크리에이터 커뮤니티를 지역산업 생태계로 육성해야 한다. 지역산업 수준으로 성장한 로컬 크리에이터 생태계는 머지않아 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다.
투자 생태계 구축, 장인대학 설립, 지역중심 지역행정 등 우리가 건강한 로컬 크리에이터 생태계를 위해 할 일은 많다. 로컬 크리에이터와 더불어 지역에 대한 인식도 바꿔야 한다.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지역을 복지, 시혜,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면 안 된다. 탈산업화 경제에서 로컬은 창조의 자원이다. 현재로서는 기존 교육과 지원 기관을 연결해 원천 기술, 창업 교육, 창업 지원을 통합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장인대학’의 설립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지역과 상생하는 로컬 크리에이터와 그들이 개척하는 지역산업이 한국 경제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