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을 사랑하는 우리는 어떤 도시를 꿈꿀까? 그 답은 골목문화 부상의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골목 문화는 단순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소비문화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다운타운(Downtown) 라이프스타일의 한 유형이다.
일터와 멀리 떨어진 교외에서 사는 것에 익숙한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이들은 도심에서 일하고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
기성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이 서버번(Suburban)이라면, 골목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은 다운타운이다.
1960-1970년대 미국의 주요 도시는 인종 분쟁의 홍역을 치렀다. 치안을 우려한 백인 중산층은 대거 도심에서 교외로 떠났다. 활력을 잃은 도심은 저소득층과 소수 인종이 거주하는 빈민가로 전락했다.
미국 중산층이 도심을 ‘버린’데에는 자동차 문화도 일조했다. 교외의 넓은 집에서 가족과 안락한 삶을 누리면서 자동차를 타고 도심의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것이 그들이 선망하는 라이프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교외로 이사한 베이비 부머(1946-1964년 출생자) 자녀들의 생각은 달랐다. 도심에서 살고 일하는 삶을 원하기 시작했다. 사실 젊은 세대의 라이프스타일 변화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식 세대는 역사적으로 항상 부모 세대와 다른 문화를 추구해왔다.
베이비부머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1990년대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은 당시 미국 주류 사회를 지배했던 서버번 라이프스타일의 대안으로 부상했다.
부모 세대에 대한 반항심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뉴욕시가 치안을 회복한 것도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의 부활에 크게 기여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고 도심 범죄율을 현저하게 떨어뜨린 루돌프 쥴리아니 시장 덕이다.
가치 변화도 일조했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은 성과와 경쟁을 강조하는 물질주의에서 다양성, 개성, 삶의 질, 개방성으로 대표되는 탈물질주의 사회로 탈바꿈했다. 부모 세대의 문화에 싫증을 느낀 젊은 세대는 도심의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문화에 열광했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젊은 층의 열망을 트렌드로 만든 것은 미디어였다.
대표적으로 뉴욕 라이프스타일도 알고 보면 드라마가 만든 이미지다. 미국 작가 찰스 몽고메리는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에서 드라마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미국 TV 드라마들은 대부분 교외에서 사는 가족들의 삶을 묘사했지만,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인기를 끈 프렌즈(Friends),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같은 드라마들은 도심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묘사했다. (…) 이전 세대와 다른 이야기와 이미지를 대중매체에 세례 받은 신세대가 성인이 되면서, 미국에서 각광받는 주택 형태도 바뀔 가능성이 있다."
한국에서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은 2000년대 중반 출현했다. 홍대 주변 골목상권이 서울의 새로운 청년문화 중심지로 떠오른 것이다.
백화점, 대형마트, 쇼핑몰을 선호하는 부모 세대와 달리 젊은 세대는 골목길의 개성 있고 다양한 독립 가게를 찾는다.
골목은 젊은이들이 획일적인 소비문화를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만의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장소다.
명품, 대량 소비, 가성비가 물질주의 소비문화를 대표한다면, 작은 사치, 감성 소비, 문화 체험은 골목길이 제공하는 탈물질주의적 가치다.
골목상권의 부상은 곧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이어졌다. 젊은 세대는 2010년 이후 골목상권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 중심지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지역은 예술과 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스타트업 생태계가 형성된 홍대다.
홍대의 많은 젊은이들은 이미 한 지역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을 실천한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은 이제 대세가 됐다. 아직 소수에 불과하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독특한 가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다운타우너’들이야말로 미래 도시 문화를 선도하는 트렌드 세터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의 확산이 예측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전 세계적으로 창조경제와 지속 가능한 사회가 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바로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창조 기업과 산업을 창출하는 혁신 생태계는 기본적으로 지역 단위 경제 시스템이다. 생산자, 소비자, 전문 인력 간 형성된 네트워크는 창조적 활동에 필요한 공유, 협업, 학습 기회를 공급한다.
인구 밀도가 높은 다운타운은 구성원의 집적을 요구하는 지역 혁신 생태계 구축에 필요한 조건이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은 또한 지속 가능한 도시 환경을 지향한다.
다운타운너들은 대중교통, 자전거, 보행에 의존하는 친환경 라이프스타일을 선호한다.
지속 가능한 복지 시스템의 구축에도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분산되어 노인들의 주거지를 도심으로 유인하는 등 복지 대상 인구를 집적화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의 확산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책 분야는 도시 재생과 지역 발전이다.
과거 도시 재개발과 신도시 건설로 서버번 라이프스타일을 지원했다면, 이제 도시재생 정책으로 미래 세대의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을 지원해야 한다.
미래 세대가 희망하는 도시재생 사업은 매력적인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의 구현이다.
도시재생을 통해 젊은이들을 위한 주거 시설뿐 아니라, 그들이 선호하는 도시 문화와 기업 생태계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은 특정 지역의 독점적 우위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지역 발전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 웨스트 빌리지, 브루클린 등 뉴욕 안에도 다양한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이 공존하듯이, 서울에서도 홍대, 성수동, 이태원이 각기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한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은 다양한 도시 문화를 요구한다. 고유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 라이프스타일은 차별화된 경쟁력으로 도시와 산업을 발전시킨다.
국내 도시 중 대표적인 사례가 제주다. 서울이 제공할 수 없는 자연주의 라이프스타일이 제주 성장의 원동력이다. 제주가 라이프스타일 도시로 자리 잡은 데에는 2010년 제주 문화를 매력적으로 묘사한 드라마 ‘인생은 즐거워’가 방영되고, 2011년 가수 이효리가 이주하는 등 방송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라이프스타일이 주는 기회는 관광산업뿐만이 아니다. 제주화장품, 녹차, 스마트 관광, 강릉 커피, 부산 어묵 산업 등 여러 지방도시들이 지역 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지역 산업을 개척했다.
수도권에 비해 물질적 자원이 부족한 비수도권 도시도 차별화된 라이프스타일로 미래 인재를 유치하고, 이들을 통해 경쟁력 있는 미래 산업을 발굴할 수 있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이 한국 경제의 미래다.
한국이 선망하는 세계의 모든 선진국은 이미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이 창출한 창조산업, 문화산업, 환경산업으로 높은 소득과 풍요로운 삶의 질을 향유하고 있다.
가치 변화의 중요성을 인식한 문재인 정부는 ‘기업 중심 경제’가 아닌 ‘사람 중심 경제’를 경제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사람 중심 경제는 소득 재분배로 사회적 약자의 소득이 높아지는 경제가 아니다. 개인의 삶의 질과 자아실현이 새로운 산업과 고용을 창출하는 경제다.
사람 중심 경제의 1차적인 실험장은 도시다.
도시재생과 지역 분권 사업을 통해 정부는 한국의 도시를 개인의 창의력과 사회적 책임성을 높이는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 도시로 재탄생시켜야 한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 도시가 ‘전국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 ‘지역이 성장을 주도하는 나라’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