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스가 서브 컬처였던 스트리트 컬처를 대중화시킨 공이 있다면 서브 컬처였던 스트리트 컬처를 럭셔리 브랜드 반열에 오르게 만든 브랜드가 바로 슈프림이다. 아직도 역대급 컬래버로 회자되고 있는 2017년 루이비통의 f/W 남성복 컬렉션에서 선보인 슈프림과의 컬래버는 스트리트 컬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루이비통의 디렉터였던 킴 존스는 인터뷰를 통해 "요즘은 슈프림 없이 뉴욕 남성복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대한 전 지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두 브랜드의 협업은 전 세계적 돌풍을 일으켰고 이 성공을 목격한 명품 브랜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와의 컬래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게다가 2018년에는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DFA)가 수여하는 ‘맨즈웨어 디자이너’ 상을 슈프림이 수상하는 이변 아닌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스트리트 브랜드가 이 상을 수상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상과 관련해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장은 “많은 전통주의자가 슈프림이 후보로 오른 것을 두고 의아하게 여겼지만 슈프림의 수상은 마땅하고 훌륭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우리 업계와 패션의 미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슈프림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이제 이 브랜드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브랜드란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슈프림은 1994년 영국계 미국인 제임스 제비아가 뉴욕 라파예트 스트리트에 첫 번째 매장을 열면서 시작됐다. 제임스 제비아는 브랜드 구상 초기 단계부터 타깃층을 명확히 했다. 그 대상은 바로 스케이트 보더들이다. 제비아는 창업 전 주변의 스케이트 보더들에게 연락을 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친구들이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개성, 그리고 반항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그들이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렇게 사전 조사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통 스케이트 보더들이란, 12살, 13살의 어린아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뉴욕에서는 18살부터 24살의 스케이트 장비를 입지 않는 젊은이들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뉴욕의 젊은이들은 헬맷과 같은 장비는 갖추었더라도 스케이트에 적합한 ‘옷’을 입고 있지 못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스케이트 보더들은 많았지만 그들의 스타일을 반영한 제대로 된 브랜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입을 수 있으면서도 특유의 스웨그를 놓치지 않는 브랜드를 직접 만들겠다고 나서게 됐고 그것이 슈프림의 시작이다. 슈프림은 첫 매장 오픈 때부터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는데 오픈 첫날부터 스케이트보드 크루들이 몰려들어 매장 안에서 보드를 타고 돌아다니게 했고, 매장에 문턱을 없애 보더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만들었다. 매장 직원들은 스케이트 보더들, 제임스 제비아의 친구들이었고, ‘슈프림’이란 이름의 스케이트보드 팀도 조직했다.
첫 번째 매장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브랜드의 스타일과 정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함께 일을 해야 한단 이유로 제임스 제비아는 직접 1980년대 스케이트 전설로 불리는 ‘댄 재거’를 런던 스토어 매니저로 채용했고, 파리 매장에는 프랑스 스케이트 보드 회사 창립자를 매니저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브랜드의 정체성이 명확한 슈프림은 판매 방식에 있어서도 고집하는 바가 있어. 절대 대량생산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보드 탈 때 옷이 찢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퀄리티가 높은 소재를 사용하고 완성도 높은 봉제 법을 사용하다 보니 제품 생산비용이 많이 들어 어쩔 수 없이 한정 판매 전략을 펴게 됐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히려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은 슈프림 마니아들 사이에서 ‘드롭 데이’라고 일컬어지는 매주 목요일, 온 오프라인에 일시적으로 소량의 제품을 판매하는데 어떤 제품이 나와도 출시와 동시에 완판이 될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리셀가에 판매된다. 특히 컬래버를 통한 한정판의 경우, 400개 이상은 절대 만들지 않는다. 제임스 제비아 스스로도 ‘600개를 내놓아서 완판 된다고 해도 우린 오로지 400개만 만든다’는 발언을 통해 그들의 방식이 얼마나 확고한지 밝힌 바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렇게 열광적 팬덤을 가진 슈프림. 전 세계에 매장이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나? 일단 매장이 있는 국가는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뿐이고 이렇게 4개국에 12개 매장만을 운영하는 것이 전부다. 94년 첫 번째 매장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제한적으로 매장을 오픈하고 있다.
무엇보다 슈프림의 희소성 전략에 정점은 다양한 브랜드들과의 켤레버라고 할 수 있는데, 슈프림은 패션계에 컬래버 열풍을 몰고 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컬래버 장인 슈프림의 첫 컬래버 상대는 어떤 브랜드였을까? 바로 반스다. 1996년 슈프림의 가치를 알아본 반스가 먼저 컬래버를 제안해서 성사된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진정성이 진정성을 알아봤다고 할 수 있다.
반스를 시작으로 나이키, 롤렉스, 노스페이스 등 다양한 장르의 브랜드들과 컬래버를 한 슈프림은 2017년 루이비통과의 컬래버로 또 한 번 이슈를 일으키는데 슈프림이 과거에 허가 없이 루이비통의 모노그램과 자신들의 로고를 합친 스케이트 보드를 만들어 루이비통의 고소를 당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모로 놀라운 켤레버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반스와 슈프림의 성장 스토리를 살펴보면 그들의 성공에는 공통된 이유가 있다. 자신의 도시에서 생활화된 라이프스타일을 진정성 있게 그들의 브랜드에 담아낸 결과라는 것이다. 과거 젊은이들에게 각광받았던 아베크롬비, 제이 크루 등의 브랜드들도 청년 문화를 표방하며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섰다. 하지만 불경기가 지속되자 저가 브랜드에 밀려 위기를 맞았는데, 돌이켜보면 그 원인을 이들 브랜드가 피상적으로 그 문화에 접근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글로벌 대기업은 앞으로도 계속 하위문화와 대안문화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새로운 도시문화를 개척하는 스트리트 컬처가 계속 주목받을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문제는 한국인데, 스트리트 컬처와 거리문화가 억제된 상황이 한국의 라이프스타일 산업을 제약하고 있다.
하나의 방법은 Kpop의 거리문화화다. 보다 많은 도시가 Kpop 버스킹과 군무를 거리문화로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스케이트 보드, 힙합, 그라피티 아트, DIY 어바니즘과 같은 외국의 스트리트 컬처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최근 양양에 스케이트 보드 파크와 군산에 스케이크 보드 축제가 열린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