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담한 지역소멸 현실에서 그래도 희망이 보인다면 여행지가 된 원도심 상권이다. 강릉, 경주, 공주, 군산, 목포, 전주, 제주 같이 문화자원이 풍부한 소도시뿐 아니라, 구미, 순천, 양양, 충주 등 전통적인 관광지가 아닌 곳도 원도심 자원으로 사람을 모은다. 강릉, 경주, 전주가 보여주듯이 지역 소도시가 원도심 골목상권을 잘 관리하면 원도심을 새로운 지역산업의 플랫폼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 골목상권을 유치하지 못한 소도시나 농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골목상권 역사에서 골목상권의 ‘비밀’을 찾아야 하는데, 2017년 발행된 ‘골목길 자본론’은 골목상권 성공 조건을 ‘C-READI’로 요약한다. 성공한 골목상권은 공통적으로 문화 인프라(Culture), 임대료(Rent),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접근성(Access), 도시 디자인(Design), 정체성(Identity) 등 6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는 것이다.
골목상권 형성 과정을 보면, 뛰어난 창업자(E)가 접근성(A)이 좋고 골목 자원(D)과 문화 자원(C)이 풍부하지만 임대료(R)가 싼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창업하고, 이를 본 다른 창업자가 주변에서 새로 가게를 열어 지역만의 정체성(I)이 뚜렷한 하나의 상권으로 발전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역으로 C-READI 기준을 만족하는 골목길은 성공적인 골목상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C-READI 모델은 단순하지만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기존 상권 분석이 유동인구, 상주인구 등 상권의 고객 기반을 강조한다면, C-READI 상권 분석은 문화자원, 정체성, 도시 디자인 등 상권의 콘텐츠 기반에 방점을 둔다. 기존 상권이 상품과 서비스를 거래하는 장소라면, 골목상권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지구다.
콘텐츠가 골목상권의 차별성이기 때문에 골목상권을 여행하듯 찾는 소비자는 그곳에서 콘텐츠, 문화, 감성, 가치를 소비한다고 말한다. 골목상권 상인도 자신의 가게를 ‘공간’, 자신을 ‘운영자’라고 부른다. 자신을 문화 공간을 운영하고 콘텐츠를 제작하는 로컬 크리에이터로 인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골목상권에서 생산하는 콘텐츠는 독립서점, 공방, 복합문화공간, 편집숍, 라운지, 게스트하우스 등 지역 문화와 커뮤니티 자원을 활용한 콘텐츠다. 외식업도 프랜차이즈나 대기업 브랜드가 아닌 독립기업과 1인 셰프가 ‘창작’하는 식음료가 주를 이룬다. 기성세대 고객을 타깃 하는 전통적인 식음료 매장이 모인 곳은 일반적으로 먹자골목으로 불린다. 식음료 관점에서 보면, 먹자골목이 골목상권의 반대말이다.
C-READI가 골목상권 입지 조건을 설명한다면, 골목상권 유치를 원하는 지역이 할 일은 명확하다. C-READI 조건을 만족하는 지역을 물색해 그곳에 골목상권을 유치해야 한다. C-READI 조건 중 기업가 정신(E)과 임대료(R)가 외재적인 변수, 즉 사전 전제조건이 아닌 골목상권 형성 과정 상의 조건이라면, 골목상권 유망지가 만족해야 할 조건은 문화자원(C), 접근성(A), 도시 디자인(D)과 정체성(I)이다. CADI(C, A, D, I)를 갖춘 지역이 골목상권 최적지다.
직감적으로 어떤 지역이 C-READI(CADI)를 만족할 가능성이 높을까? 그동안 지역을 탐방한 경험에서 도출할 수 있는 C-READI 유망 지역은 70년대 ‘부자 동네’, 골목상권 인접 저층 주거지, 국립공원 입구마을, 건축마을, 1인가구 밀집 저층 주거지, 발달상권 인접 저층 주거지, 역세권 저층 주거지, 대학가 저층 주거지 등 총 8개 지역이다. 아래 표에서 각 지역이 만족할 가능성이 높은 C-READI 조건을 함께 제시한다.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 즉 CADI 조건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에서 만족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70년대 부자 동네와 골목상권 인접 저층 주거지다. 70년대 부자동네는 원도심에 형성된 접근성, 보행환경, 건축자원이 우수한 저층 주거지다. 골목상권 현상이 처음 시작된 서교동, 그리고 삼청동, 연희동, 대구 삼덕동, 광주 동명동, 강릉 명주동 등 골목상권 중심지로 자리 잡은 동네의 상당수가 70년대 부자동네다.
이미 활성화된 골목상권에 근접한 저층 주거지역도 성공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서울 골목상권 중심지인 홍대, 이태원, 성수동, 삼청동도 인접 저층 주거지 확장 과정을 통해 거대 상권으로 성장했다. 물론 모든 인접 저층 주거지가 확장 대상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존 상권과의 접근성이 제일 중요하다. 지형지물이나 대로로 분리된 배후 주거지역이 골목상권에 편입될 가능성은 낮다.
한옥, 적산가옥, 창고 등 풍부한 재생 건축자원을 보유한 지역이 그다음 유망한 곳이다. 돌이켜보면, 골목상권은 하드웨어, 즉 건축자원과 접근성이 주도한 문화현상이다. 콘텐츠로 만들 수 있는 건축자원이 우수한 지역에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크리에이터가 진입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맞다. 건축자원이 중요하다 보니 새로운 문화지구를 원하는 많은 지역이 한옥마을을 인공적으로 조성한다.
C-READI 모델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C-READI 조건을 상당 수준 만족하지만 골목상권으로 활성화된 곳을 찾기 어려운 지역이 국립공원 입구마을이다. 적어도 국립공원 C, D, I가 우수한 지역이다. 국립공원이라는 문화자원, 국립공원, 사찰, 자연이 주는 정체성, 자연마을이 주는 공간 디자인이 국립공원 입구마을의 큰 장점이다. 국립공원 입구마을이 활성화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입구마을 부동산 재산권, 마을 거버넌스 등 C-READI가 아닌 다른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
1인 가구, 발달상권 인접, 역세권 저층 주거지도 CADI 조건을 2개 만족하는 지역이다. 1인 가구는 1인 가구 문화, 발달상권 인접 지역과 역세권은 접근성이 가장 큰 장점이다. 커피, 베이커리, 독립서점, 제로웨이스트 등 골목상권 콘텐츠는 1인 가구를 구성하는 MZ세대가 선호하는 콘텐츠다.
미스터리라면 미스터리인 지역이 대학가 저층 주거지다. 골목상권이 문화지구라면 대학이라는 문화자원을 보유한 대학가가 골목상권 입지로 유망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문화지구를 보유한 대학가를 찾기 어렵다. 홍대, 연세대, 고려대 정도가 떠오른다.
대학가가 골목상권을 보육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시 디자인과 대학 문화다. 절대다수의 대학 캠퍼스가 원도심에서 벗어난 교외 지역이나 원도심에 있어도 상권과 주거 지역과 분리된 지역에 입지해 있다. 대학가가 가성비를 원하는 대학생 중심으로 형성된 것도 대학가 부진의 원인이다. 구매력을 갖춘 교직원은 대학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이 한국 대학 문화다.
유망 지역이 공동적으로 보유한 자원이 도시 디자인, 즉 골목 자원이다. 한국의 골목상권은 거의 예외 없이 골목길과 저층 건축물로 구성된 골목지역에 위치해 있다. (골목지역 역사와 정의는 이글) 신도시가 골목상권을 유치한 사례는 일산 밤가시마을, 분단 정자동 느티로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왜 골목지역과 저층 주거지가 골목상권에 유리한지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콘텐츠로 만들 수 있는 거리, 건축 자원, 문화 자원에 원도심 골목지역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C-READI를 부존자원으로만 인식할 필요는 없다. 문화자원, 도시 디자인, 접근성은 정부 개입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 저층 건물과 걷기에 편한 거리, 주거지와 상업시설 공존 등의 복합적 공간 디자인과 편리한 대중교통 구축을 통한 접근성 개선은 정부가 비교적 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골목상권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기업가 정신과 정체성은 인공적으로 공급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안 부재 상황에서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결집해 소멸지역 원도심에 더 많은 콘텐츠 상권, 로컬 콘텐츠 타운을 조성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문화자원과 이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의 중요성이 문화창출 능력을 강화해야 하는 지역이 골목상권을 육성해야 하는 근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