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중국 정부가 투자 자유화를 통해 국제금융도시로 키우고자 경제특구로 지정한 상하이 푸둥신구는 높은 빌딩이 가득한 금융 무역지구로 변신했다. 마천루 숲이 돼버린 상하이도 한때는 골목 도시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의 80퍼센트가 스쿠먼(石庫門) 단지 등 저밀도 주택단지에서 거주했다.
고층건물과 쇼핑센터가 즐비한 가운데 사라지고 가려졌던 골목길은 오늘날 젊은 세대와 외국인이 찾는 골목상권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서구적이고 힙(hip)한 쇼핑거리 신티엔디(新天地), 젊은 예술의 거리 티엔즈팡(田子坊) 등이 상하이의 대표적인 골목상권이다.
좁고 오래됐지만 이색적인 느낌이 가득한 골목이 인기를 끄는 것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전통 건축을 복원하는 레트로 붐이 불고 있다. 서울에서는 한옥마을, 상하이에서는 "스쿠먼 마을"이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두 도시 모두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전통 주택을 보호하고 단지를 조성한다. 그러나 전통 주택에 대한 반응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전통가옥의 실제 거주 수요가 증가하는 데 비해, 한국은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인식에 머물러 있다. 왜 이토록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일까.
문화로 주변국을 지배한 경험이 있는 중국은 문화의 힘을 이해하고, 경쟁력으로 활용하는 데 익숙하다. 반면 전통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정체성보다는 편리성과 트렌드를 따르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문제는 미래다. 상하이가 스쿠먼 주택과 거리를 복원하는 것을 보면서, 서울이 상하이 골목상권과 경쟁할 수 있는 전통문화 상권을 배출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한옥을 포함한 전통문화의 생활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기대할 수 있는 미래다.
엄격히 말해 스쿠먼은 전통가옥이 아니다. 상하이가 반식민 지배를 받던 조계(租界) 시대(1850~1940년대)에 유럽인들이 중국인 근로자를 위해 지은 근대 건축물이다. 외관은 당시 유럽과 미국의 산업도시에서 근로자를 위해 건설한 공동 주택과 비슷하지만, 중국 풍수 전통에 따라 남과 북에 각각 정문과 후문을 뒀다.
외관은 유럽식 연립주택과 비슷하고, 내부 구조는 정원을 사이에 두고 삼면이 가로막힌 중국 삼합원(三合園) 형태다. 대문 위 상인방의 넝쿨 장식과 박공, 툭 튀어나온 베란다 역시 유럽 건축의 영향이다. 스쿠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돌(石)로 문틀과 기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도선미, 「100년 묵은 상하이 서민의 집, 스쿠먼 탐방기」, 《중앙일보》, 2016
가옥들은 직선 골목길 양쪽에 나란히 놓여 하나의 블록을 이룬다. 중앙 골목길을 중심으로 평행 배치된 블록들이 모여 주택 단지를 이룬다. 이러한 저밀도 공동주택 거주 단지를 "리롱(里弄)"이라고 불렀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스쿠먼 주택 건축을 중단했을 당시, 400만 명의 상하이 주민이 9000개의 리롱에 거주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실행된 대규모 철거로 2017년 현재 상하이에 남아 있는 리롱은 약 1900개에 불과하다.
1949년 이후 중국 공산당이 건축한 노동자 주거지 "공인신촌(工人新村)"도 2~3층 공동주택으로 이뤄진 저밀도 집단 주거 단지였다. 상하이시는 1949년부터 1978년까지 모두 256개의 공인신촌을 건설했으며, 그중 86퍼센트인 196개를 1951년부터 1958년에 집중적으로 건설했다. 경제개방 이전의 상하이는 이처럼 전통적인 리롱과 1950년 건설한 공인신촌 저밀도 주택단지로 구성된 도시였다.
고속 성장 과정에서 상하이는 처음에 저밀도 주택단지를 고층건물과 대형 쇼핑몰로 교체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서양과 중국 건축 양식이 혼합된 이국적인 분위기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스쿠먼 단지를 보호하기로 했다.
상하이의 대표적인 쇼핑거리로 재탄생한 신티엔디와 티엔즈팡에 이어 최근에는 젠예리(建業里)와 시테 부르고뉴(Cite Bourgogne) 등 프랑스 조계지 내의 스쿠먼 단지를 최고급 주택가와 쇼핑 단지로 새롭게 개발했다.
눈여겨볼 점은 최근 들어선 스쿠먼 단지가 주거지라는 것이다. 상가 중심으로 개발한 신티엔디와 티엔즈팡과 달리, 젠예리는 상하이 부유층과 외국인을 위해 만든 최고급 주택지다. 상하이뿐만이 아니다. 베이징 중국 부유층 사이에도 전통 주택 후통(胡同)을 개조해 자택, 사무실로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다.
전통가옥을 선호하는 중국의 엘리트 계층과 아파트나 주상복합을 선호하는 한국의 엘리트 계층. 이들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를 단순히 선호와 문화의 차이로 평가해야 할까. 한국 고유의 문화 경쟁력 제고를 위한 역사적 전통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가볍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한옥의 생활화를 위해 정부가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울 은평 뉴타운 등 일부 지역에서 단열기법, 조립식 건축 등의 신기술을 접목한 한옥 단지를 조성하고, 기존 한옥 보전을 위해 적지 않은 보조금을 지원한다.
하지만 서울시 가구 전체를 보면 한옥 가구 수는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다.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건설하는 한옥마을도 실질적으로는 주민이 살지 않는 관광단지다. 한옥마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전주 한옥마을에서도 한옥 주택이 상업시설로 전환돼 거주민의 비중은 갈수록 줄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쟁력 있는 도시 외관과 정체성을 원한다면, 중국뿐만 아니라 한옥호텔을 경쟁적으로 짓는 국내 호텔업계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현대중공업은 2015년 6월 강릉에 6성급 "씨마크 호텔"을 개장했다. 이 호텔이 자랑하는 시설 중 하나는 한옥 스위트 객실인 "호원재"다. 호텔 측은 “품격 있는 휴식과 전통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최고급 한옥 객실을 선보이기 위해” 호원재를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시기에 앰배서더 호텔 그룹은 인천 송도에 건물 전체가 한옥인 "경원재 앰배서더 호텔"을 오픈했다. 2만 8000제곱미터의 넓은 부지에 총 30개 객실을 갖춘 객실동과 영빈관, 한식당 건물로 구성된 이 호텔은 한옥호텔로서는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호텔신라도 장충동 부지에 대규모 한옥호텔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최고급 호텔이 한옥 건물을 신축하는 이유는 외국인 관광객이 한옥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현지 문화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외국인 여행객들은 한옥에서 숙박을 하며 한국문화를 체험하고자 한다.
한옥 시설은 호텔의 품격을 상징하는 역할도 한다. 고급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호텔로 마케팅함으로써 기업 문화의 대외적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다. 한옥의 이러한 홍보 가치 때문에 호텔을 운영하지 않는 대기업도 별도로 한옥 영빈관을 마련해 외국 귀빈을 접대한다.
한옥 붐은 이제 한옥 시설을 통해 관광 수요를 창출하고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는 호텔과 기업에서 일반 시민으로 확산돼야 한다. 한옥에 대한 국내 관심과 소비가 부족한 탓에, 한옥 건축 인력 대부분이 기존 한옥을 보호하고 보전하는 일에 집중돼 있다. 한옥에 대한 대중적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전문 건설 기업들도 한옥 산업화와 시장화에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전통문화의 산업화에 한국 산업의 미래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성과 문화를 중시하는 선진국 소비자를 만족시키려면 기술력이 접목된 한국만의 특별한 상품과 서비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와 가치에서 영감을 얻어 첨단 기술과 혁신적인 사업 모델이 결합된 창의적인 상품이 생산되지 않으면, 미래 시장에서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울시가 2015년에 발간한 「서울의 미래」에서 네이버 김상헌 전 대표는 한국사회의 고유한 생활문화가 IT 기업에 많은 비즈니스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료 문자 메시지 시장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메신저 서비스 카카오톡과 한국에만 존재하는 음식 배달 문화에 IT 기술을 접목한 배달의 민족 등이 한국의 특수성을 사업에 반영한 대표적인 사례다.
전통문화는 외국 기업이 모방하기 힘든 한국 기업만의 원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문화의 산업화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실현해야 하는 새로운 성장 전략이다.
한옥 사례에서 보듯, 전통문화 산업이 부진한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실생활에서 전통문화를 즐기지 않는 데 있다. 대중화를 통해 시장 수요가 창출되지 않는다면, 전통문화의 산업화와 세계화는 유명무실해진다.
그렇다면 한국 전통문화 정체성이 뚜렷한 골목상권은 과연 가능할까. 열악한 전통문화 환경에서도 전통문화로 경쟁력을 유지하는 상권이 인사동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거리답게 건축물, 거리 디자인, 상업시설이 판매하는 상품들 대부분이 전통문화에 기반한다. 문제는 서울의 다른 상권이다. 글로벌 도시에 걸맞게 다양한 외국 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환영하지만, 최소한 반 이상의 상점은 한국다운, 국적 있는 상품을 판매해야 하지 않을까.
대표적으로 정체성을 상실한 업종이 바로 주점이다. 언젠가부터 일본식 주점 이자카야가 전국의 골목상권을 점령했다. 전통을 담은 다양한 맛과 디자인의 한국식 주점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일본식, 중국식, 서양식 주점이 간간이 섞여 있는 것이 이상적인 한국문화 중심의 상권일 것이다.
일시: 2018년 1월27일 오후12시
장소: 예스24 수영점 F1963
주제: 라이프스타일에서 찾은 부산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