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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Jan 24. 2018

역사가 작품이 되는 도시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수도 에든버러는 인구 50만의 작은 도시다. 공식적인 통계로 잡히는 주요 산업은 행정, 교육, 그리고 금융이다. 15세기 이후부터 스코틀랜드 수도였던 에든버러의 가장 큰 산업은 행정이다. 정부의 주요 기관과 공공 미술관, 박물관, 연구기관이 모두 밀집되어 있다.


또한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에든버러대학을 비롯한 네 개의 종합대학을 보유한 교육 도시다. 대학에 재학하는 학생 수가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대학생이 많다.

런던 다음으로 큰 영국의 금융 중심지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은행, 세인스버리 은행, 테스코 은행, 스코티시 윈도즈, 스탠더드 라이프 본사가 여기에 있다.



문학 전통의 근원, 역사가 느껴지는 도시경관


하지만 여행자의 이목을 끄는 산업은 따로 있다. 18세기 이후 애덤 스미스(Adam Smith), 데이비드 흄(David Hume), 최근에는 해리 포터 저자 조앤 롤링(Joan K. Rowling)까지, 작은 도시가 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수의 작가를 배출한 이야기 산업이다. 단순히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였기 때문일까? 다른 교육 도시들의 작가 배출 성적을 볼 때, 교육 중심지였다는 이유만으로는 작가 생산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에든버러의 무엇이 이야기 산업을 발전시켰을까? 그것은 아마 지역 역사와 상상력의 융합 덕분일 것이다. 역사와 전설을 작품으로 만드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문화 말이다.


2015년 1월 에든버러 역에 도착해 호텔로 가는 길 언덕에서 색다른 가두 간판을 만났다. 매주 주말이면 세계 제일의 문학도시(The World’s First City of Literature)가 배출한 작가들이 살던 집과 자주 드나들던 장소를 구경시켜주는 투어가 제공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에든버러 작가 투어를 안내해주는 표지판


에든버러의 문학 전통을 잘 몰랐던 나는 간판에 적힌 작가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월터 스콧(Walter Scott),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제임스 매튜 배리(James Matthew Barrie), 알렉산더 맥콜 스미스(Alexander McCall Smith), 이언 랜킨(Ian Rankin), 그리고 조앤 롤링이라니.


스코틀랜드의 민족시인 로버트 번스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별의 노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가사를 썼다.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시를 쓴 그는 친구와 함께 스코틀랜드 민요와 설화를 수집할 정도로 모국을 사랑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의 생일인 1월 25일을 ‘번스의 밤’으로 부르며 국경일처럼 기린다. 


번스와 더불어 스코틀랜드 문학과 문화를 대표하는 작가가 월터 스콧이다. 1771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는 번스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작은 도시들의 옛 전설과 민요를 채집해 출판하기도 했다. 2017년 스코틀랜드 은행은 「마지막 음유시인의 노래(The Lay of the Last Minstrel)」, 「호수의 연인(The Lady of the Lake)」, 「로브 로이(Rob Roy)」를 대표 작품으로 남긴 그의 초상을 10파운드 은행권에 새겼다.


월터 스콧이 새겨진 영국 화폐


에든버러 문학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졌다.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아서 코난 도일도 이곳에서 태어나 의학 공부를 마쳤다. 1887년 셜록 홈스가 처음 등장하는 소설인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를 시작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작가 투어 안내 간판에 적힌 이름 중 나를 가장 놀라게 한 사람은 조앤 롤링이었다. 해리 포터를 쓴 작가가 에든버러 출신임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지역 스토리와 배경을 토대로 작품을 쓴 다른 작가들과 달리 해리 포터와 스코틀랜드, 특히 에든버러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리 포터와 에든버러의 첫 번째 연결고리는 작품의 탄생지라는 점이다. 에든버러는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의 첫 편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을 쓴 도시다. 그녀는 남편과 결별한 후 소설의 첫 3장이 담긴 원고를 가지고 언니가 살던 에든버러로 갔다.


그리고는 변변한 직장 없이 시간 날 때마다 시내 카페에서 원고를 완성했다. 집필 장소는 시내 여러 곳에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카페 엘리펀트 하우스다.


롤링의 집필장소였던 카페 엘리펀트 하우스(좌)와 에든버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는 사진(우)


롤링은 작가로서 크게 성공한 후에도 에든버러를 떠나지 않고 지역사회의 지도자로 기여했다. 2008년 하버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한 그는, 2004년 에든버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명예박사학위 사진이 에든버러대학 채플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에 영감을 주는 에든버러


그러나 해리 포터 소설에서 에든버러가 더 중요한 이유는 공간적 배경이 된 도시 경관 때문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는 소설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배경이었다. 호그와트 마법학교와 마법사들의 세계는 모든 것이 상상의 결과만은 아니다. 에든버러와 스코틀랜드에 가보면 롤링이 이 지역의 역사와 외관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에든버러는 판타지 소설의 소재를 제공하는 전설과 건물로 가득하다. 한국예술 종합학교 양정무 교수는 “영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중세의 무대로 느껴지는 것은 고딕 건축 양식이 19세기에 들어 대대적으로 다시 유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대 강국이 된 영국이 문화 정체성 강화를 위해 건축한 중세 종교 건축이 이야기 산업의 기반이 된 것이다.


2017년 출판 20주년을 맞아 전 세계 팬들이 꼽은 에든버러의 해리 포터 ‘성지’는 엘리펀트 하우스, 조지 해리엇 스쿨, 그레이프 라이어 묘지, 발모랄 호텔 등이다.


그레이프라이어 묘지(좌)와 발모랄호텔 전경(우)


그레이프 라이어 묘지는 소설 속 인물들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의 무덤을 찾을 수 있는 장소다. 볼드모트의 본명인 토머스 리들(Thomas Riddle)은 실존했던 에든버러 인물이고, 그의 묘비가 이곳에 있다. 미네르바 맥고나걸 교수의 모델로 추정되는 시인 윌리엄 맥고나걸(William McGonagall)도 여기에 잠들어 있다. 


해리 포터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호그와트 마법학교는 에든버러 중심에 위치한 조지 해리엇 스쿨(1628년 개교)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펀트 하우스 근처에 위치한 이 학교는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답다. 관광객에게 개방하지는 않지만, 매년 여름 열리는 에든버러 축제 기간에는 작은 행사를 주최한다.


18세기 이후 에든버러가 배출한 탁월한 학자와 작가의 동상과 무덤이 모여 있는 로열 마일은 이 도시의 정체성과 전통을 상징한다. 


1900년대 건축된 글렌피넌 고가교



역사에 녹아 있는 학문 전통과 이념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문학, 사상, 과학은 1707년 합병 법안(Union Act)을 통해 대영제국에 합류한 후 번성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였던 스코틀랜드의 국민들은 대영제국이 제공한 해외 진출 기회를 적극 활용해 문화 중심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부와 지식을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자유, 자족, 도덕적 규율, 과학기술 존중 등의 가치가 스코틀랜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외부 기회를 진취적으로 활용한 데에는 16세기 스코틀랜드 교회를 개혁한 존 녹스(John Knox) 목사의 장로교회가 큰 역할을 했다. 녹스 목사는 스코틀랜드인은 선택받은 사람이며, 스코틀랜드는 새로운 예루살렘이 돼야 한다고 설교했다.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당시 기준으로 가장 민주적인 교회 조직을 운영했다. 이런 민주적인 토양에서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The Scottish Enlightenment)가 발현할 수 있었다.


공교육 시스템도 문학과 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녹스 목사는 국가가 국가 교육제도를 도입해 시민들을 직접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이를 점진적으로 수용한 덕에 18세기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시민들이 살고, 유럽 여러 국가의 평민들이 유학을 오는 대중적인 대학교육을 실시하는 국가가 됐다.


시장, 자유, 규율 등으로 세계 시장에서 성공한 스코틀랜드 엘리트들은 자신의 경험을 하나의 철학으로 정리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라고 불리는 이 철학은 자유주의 철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미국 독립사상, 장로교 선교 등을 통해 세계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에든버러 지식인들도 따지고 보면 스코틀랜드의 가치와 경험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학자들이다. 애덤 스미스의 시장 경제주의는 스코틀랜드의 경험과 이익에 기인한다. 스코틀랜드의 경험에서 자유 무역의 우월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흄도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경험을 통해 삼권분립, 분권 등 자유주의 가치와 제도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에든버러의 아담 스미스 동상


에든버러는 전통 보전과 교육을 통해 뚜렷한 역사관과 소명의식을 가진 위대한 작가를 배출한 도시다. 전통과 역사가 창조의 원천인 것이다. 해리 포터와 다른 스코틀랜드 배경 판타지 소설이 보여주듯, 미래에 대한 영감도 역사와 과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품은 도시에서 명작이 탄생한다


뚜렷한 가치와 영혼이 담긴 한국의 길과 도시는 어디인가. 한국의 수많은 도시가 이야기 산업을 키우고자 하지만, 에든버러 같이 역사와 정체성을 보전한 도시만이 그것을 이룩해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지역 콘텐츠 산업을 육성하기에 앞서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이 경관과 문화를 통해 드러나는 도시를 육성해야 한다. 역사 속에 사는 것이야말로 과거가 현재로 이어져 미래를 창조할 풍부한 영감을 얻는 이야기 산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골목길 경제학자 부산 강연에 초대합니다

일시: 2018년 1월27일 오후12시

장소: 예스24 수영점 F1963

주제: 라이프스타일에서 찾은 부산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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