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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효 May 21. 2023

열일곱의 라일락

 첫 중간고사를 마치고 시작된 축제는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는 날이었다. 여고인 우리 학교와 마주 보고 있는 남고가 합동으로 축제를 진행한다는 점도 특별했다. 수업 없는 하루는 더없이 행복했고 모두가 들떠 즐겁게 웃었다.


 동아리에서 준비한 부스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에서 양손에 소시지와 슬러시를 들고 호객 행위 하는 학생들을 지나 축제를 맘껏 즐기던 중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남고 밴드부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순정만화의 클리셰처럼 드럼 치는 밴드부원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때 나는 어떤 락밴드를 무지하게 좋아했다. 첫눈에 반한 밴드부원은 그 락밴드의 보컬과 닮았고, 하필 그날 내가 좋아하는 노래까지 연주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머릿속엔 운명이라는 글자가 맴도는데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금사빠이자 얼빠인 내가 순식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반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여고에서는 축제가 끝나고도 며칠 동안 이 밴드부원의 신상과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사였다. 나이는 고3, 문과반, 여자친구 없음 그리고 매점에 자주 출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쉬는 시간마다 매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먼발치서 지켜만 보던 어느 날, 어떻게든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삼각 김밥에 편지를 붙여 드시라며 던지듯 주고 도망갔다. 그 편지에는 공연을 잘 봤다는 내용과 함께 은근슬쩍 내 이름과 메신저 아이디를 적어뒀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학원을 마치고 돌아와 메신저를 켰는데 삼각김밥 잘 먹었다며 밴드부 오빠에게 쪽지가 와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공연 잘 보았다고 답장을 보내며 또 쪽지가 올까 안절부절, 초긴장 상태로 입술만 계속 뜯고 있었는데, 고맙다는 쪽지가 다시 왔다. 꽤 오랫동안 메신저로 이야기하며 말도 놓게 되었다.


 그날 이후 휴대폰 번호도 받아 거의 매일 문자나 메신저로 이야기했다. 너무나 꿈같은 시간이라 붕 떠 있는 느낌으로 지냈는데 잠을 덜 자도 피곤하지 않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다.




 어느 날 항상 야간자율학습을 도망가던 오빠가 그날은 선생님께 잡혀서 어쩔 수 없이 10시까지 야자를 해야 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1, 2학년은 9시까지, 3학년은 10시까지가 야간자율학습 시간이었는데, 심화반이라고 하여 일주일에 두 번,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반에 들어가 있던 나는 마침 그날, 10시까지 야자를 하는 날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 집에 갈 때 어느 방향으로 가냐고 묻는데, 갑자기 심장이 또 빠르게 뛰었다. 오빠와 우리 집은 반대였지만 오빠가 버스를 타는 정류장에는 우리 집으로 가는 버스도 있었다. 같은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고 속셈이 뻔한 거짓말을 했다. 좀 돌아가긴 하지만 집에 가는 버스가 오는 건 맞으니까.  

 

 그 해 여름방학 전까지, 오빠가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날에는 마침 10시까지 있어야 하는 날이라며 심화반 수업이 없어도 혼자 교실에 한 시간을 더 남아 있다가 같이 하교하곤 했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더없이 완벽했던 날씨와 어둠 속 가로등 불빛만이 앞을 밝히던 길 그리고 어디선가 실려 온 달콤한 라일락 향기. 나란히 걷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울렁인다.


 열일곱 살의 첫사랑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봄의 따스함처럼 라일락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건 일 년에 고작 1, 2주 정도이다.


 향기를 맡고 싶어 라일락 주변을 어슬렁거려도 그때의 바람과 온도, 나와 꽃의 방향,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향기를 내어주지 않는다.


 운 좋게 꽃향기를 맡아도 놀랄 정도로 빨리 사라지는데 조금 더 맡고 싶어 킁킁거리지만 더 이상 아무런 향을 느끼지 못할 때가 태반이다.


 하지만 어렵게 향기를 맡은 찰나의 순간, 나는 설레었던 열일곱 살의 그날로 돌아간다. 마치 하이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던 그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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