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슬픔 앞에 한없이 작아진다
인간에게는 수많은 허물이 있다. 남의 작은 흡집은 너무 쉽게 포착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큰 결함을 직시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오죽하면 ‘알아차림 명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제대로 마음 잡고 고요히 앉아야만 자신을 볼 수 있는 지경이겠는가. 구조적으로 두 눈이 밖을 향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 자신의 허물을 보고 인정하는 것이 괴롭기 때문이리라.
수년 전 아침 출근 길 횡단보도에서 접촉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다. 그날 아침 잊을 수 없던 장면은 찌그러진 자동차가 아니다. 찌그러진 운전자의 표정이었다. 상대방에게 삿대질 하며 소리 지르는 그 표정은 화가 난 것을 넘어 분노, 노여움, 울화 등 알고 있는 모든 유사 단어가 부족할 정도의, 폭발 일보 직전의 격앙된 화산 같았다. 붉어진 얼굴에 격노한 눈빛이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발길을 돌려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화난 표정이 저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내가 화날 때 표정도 저렇겠지?’
솔직히 나도 화가 날 때는 얼굴이 후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화가 누그러질 때가 되어서야 직전까지 내 심장박동이 얼마나 격했는지 알아차린다. 문제는 그런 화가 혼자 조용히 일어났다가 가라앉으면 되는데 가끔씩 주위 사람들에게 전가된다는 데 있다. 타인에게 짜증을 낸다거나 맘에도 없는 악담을 하여 또다른 화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다만, 분노 표출에도 때와 장소를 어느 정도는 가릴 줄 알아야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기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자기통제를 자연스럽게 체인간에게는 수많은 허물이 있다. 남의 작은 흡집은 너무 쉽게 포착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큰 결함을 직시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점도 그 중 하나다. 오죽하면 ‘알아차림 명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마음 잡고 고요히 앉아야만 자신을 볼 수 있는 지경이다. 구조적으로 두 눈이 밖을 향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 자신의 허물을 보고 인정하는 것이 괴롭기 때문이리라.
수년 전 아침 출근 길 횡단보도에서 접촉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다. 그날 아침 잊을 수 없던 모습은 찌그러진 자동차가 아니라 찌그러진 운전자의 표정이었다. 상대방에게 삿대질 하며 소리 지르고 있는 그 분의 표정은 화가 난 것을 넘어 분노, 노여움, 울화 등 알고 있는 모든 유사 단어로도 묘사가 힘들 정도의, 폭발 일보 직전의 격앙된 화산 같았다. 붉어진 얼굴에 격노한 눈빛이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발길을 돌려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화난 표정이 저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내가 화날 때 표정도 저렇겠지?’
솔직히 나도 화가 날 때는 얼굴이 후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화가 누그러질 때가 되어서야 직전까지 내 심장박동이 얼마나 격했는지 알아차린다. 문제는 그런 화가 혼자 조용히 일어났다가 가라앉으면 되는데 가끔씩 주위 사람들에게 전가된다는 데 있다. 타인에게 짜증을 낸다거나 맘에도 없는 악담을 하여 또다른 화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다만, 분노 표출에도 때와 장소를 어느 정도는 가릴 줄 알아야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기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자기통제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간혹 임계점을 넘는 실수를 범한다. 나 또한 그러한데, 그럴 경우에는 후에 무거운 '자책'이라는 대가를 치루게 된다. 나의 경우에는 분노가 올라올 경우 이유없이 부모님들께 짜증을 많이 냈던 것 같다. 아마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쉽게 용서해줄 것 같아서 그랬겠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엄마이기도 한데, 참 모순적인 감정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더 편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을까. 엄청 비겁하고 그래서는 안되는데 큰 일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주 우연히, 무릎을 “탁!” 칠만한 현자의 말씀을 들었다.
“가위는 바위에게 지고, 바위는 보에게 진다.
가위는 분노이고, 바위는 두려움이다. 분노는 두려움에게 진다.
보는 슬픔이다. 두려움은 슬픔에 진다.”
존경하는 어른신이 저녁을 드시면서 툭 던지신 이 말씀에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우리의 내면에는 매일, 매순간 복잡한 감정들이 활개를 펴고 서로 기싸움을 하며 돌아다닌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잘 표현된 ‘콘트롤 본부’를 분노가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분노의 대상을 찾게 된다. 그러나 눈앞에 대상이 아주 무서운 존재라면 그 분노는 사그라들고 분노가 아닌 두려움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두려움조차도 슬픔 앞에서는 기를 펼치지 못하고 슬픔에 묻히게 된다.
내가 울컥했던 이유는 돌아가신 아빠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철없던 투정도, 짜증도, 전부 받아주던, 한없이 넓었던 우리 아빠가 돌아가신 지 수년이 지났지만, 그 슬픔 앞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전부 다, 흔적도 없이, 묻히고 만다.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지울 수 없는 행동들에 대한 자책뿐이다. 누군가에게 화를 냈다가 자책을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유한함을 알기 때문이다.
감정을 나타내는 한국어 단어 중 70% 이상이 불쾌한 감정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놀랍게도 불쾌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보호 본능과 같은 역할을 하여 긍정적 감정만큼이나 중요한 순기능을 한다고도 한다. 해가 지면 어둠이 두려워 집에 뛰어 들어가고, 한겨울 추운 날씨가 염려스러워 포근한 가을날에 미리 장작을 준비해두는 것은 모두 부정적 감정에서 비롯된 보호본능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그러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명분 없이 내밷는, 분노를 위한 분노는 지양하는게 백번 맞다.
나도 알고 있다. 막상 분노가 감정 콘트롤 타워를 덮치는 그 순간에는 가위가 바위를 이길 수도 있고, 보가 가위를 이길 수도 있을만큼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평소에 <가위-바위-보> 이론을 곱씹어 장착해 놓는다면, 후에 찾아오는 대가의 무게를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자꾸자꾸 곱씹어 본다.
“분노는 두려움에 무너지고,
결국 그 두려움도,
슬픔 앞에는 한없이 약하게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