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시작점 : 김정운의 [에디톨로지]를 읽고
그 이유를 탐구하는 행위 자체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다만 탐구에 대한 의지는 관계 속에서 나온다. 무인도에 갇혀 다른 인간과 어떠한 접촉도 없이 지내는 인간은 그저 사람이다. 인간(人間)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 나아가 과거의 나, 미래의 나와의 관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각기 다르게 성립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 인간은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서 있는 이 세계 자체가 공포로 가득하다. 내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위해 있는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시간과 공간을 우리 통제 하에 놓고 싶어 했다. 하이데거의 실존 철학에서 '세계-나-존재'라는 개념은 나라는 존재가 시간과 공간에 아무 대책 없이 내던져짐을 의미한다.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존재의 확인을 위한 좌표를 정하는데, 그렇게 하루는 24시간이 되고 하루들은 모여서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된다. 그리고 365일이 모여 1년이 된다. 1년은 매번 반복되고, 우리는 이것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잘못되더라도 내년에 다시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반면 공간에 대한 공포는 시간에 비해 좀 더 구체적이다. 공간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 속에 재현하기도 한다. 유한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자리, 땅의 지도가 만들어지면서 인간은 무한한 공간의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시공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인간은 인간만의 질서를 만들어 모든 것을 질서라는 틀에 종속시킨다. '신'이라는 존재는 미지의 것들에 불안감을 느낄 때면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절대불변의 전지전능한 질서다. 이에 더해, 신분과 권력은 무분별한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질서이며, 이성은 본능과 욕망, 감정이 앞서는 인간 존재의 예측 불가능한 속성에 대한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 낸 질서다. 그렇게 질서-무질서라는 프레임으로 이 세계를 대립 관계로 편집한 인간은 여기에 선-악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질서는 선이요, 무질서는 악이라며.
신이 선이었던 시대를 지나, 이성이 선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 사고를 향한 인간의 믿음은 엄청난 수준의 학문적 성과를 일구어 낸다. 이성은 인간 세계를 진보로 이끌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20세기 초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2번의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인간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그 오만함에 스스로 뒤통수를 맞았다. 그렇게 보편적인 '옳음'을 지향했던 철학과 사회과학은 갈 길을 잃었다. 신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이성이라는 질서도 불사의 삶을 얻지 못했다.
그럼 그 순간 불안감에 휩싸인 인간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건 무엇이었나?
2차 대전 이후 여러 가치들이 등장했다.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 즉 인간 존재 이유를 과거 속에서 찾는 이들이 있었고, 미래를 바라보고 새로운 가치를 찾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가치를 찾는 과정에 건재하던 권력 계층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이에 급속도로 발달한 군사 무기가 더해지면서 1950~60년대는 이념 전쟁으로 물들었다. 결국 근대의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분법적인 구조 속에서 지배 계층(군사적, 경제적 신분)이 제시하는 질서에 순응한다. 사회가 '편집'해 대중에게 주입하는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것이다.
첫 번째,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
두 번째, 절대적인 것은 없음을 인정하는 것.
두 가지의 과제는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다. 과거의 과오가 바로 인간이 만든 질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었지 않은가. 이제 우리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매 순간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세계는 변하지 않지만 우리가 변해서 세계가 변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또 나는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이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 세계는 아주 상대적이다. 불변하는 정답이 있다기보다는 지향점이 있을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지향점을 따라가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다른 무엇관 교류하고 소통해야 한다. 정답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더 좋은 답, 덜 나쁜 답을 찾는 것이다. 상대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타인 혹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이 주장은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된 다양화, 세계화와 그 논리를 같이 한다. 그러나 다양성을 논할 때, 자신의 가치가 옳은 것이라 강요하면서 타인의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존중받을 수 없다. 타인과 교류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를 따라가려면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넓혀야 한다.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만큼만 보고, 보이는 만큼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이다. 인식 범위가 바뀌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다르게 말하자면, 세계는 의도적이던 의도적이지 않든 간에 특정 질서에 의해 규정되고 편집된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세계가 편집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 우리에게 보이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고 다양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변화를 바라보며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선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세계가 구성되고 인간이 있었던 순간부터 존재의 불안정성을 지우기 위한 편집은 줄곧 존재했다. 다만 과거에는 믿지 않았다. 질서와 시스템 속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최대한 많은 것들을 알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나'라는 자아와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실존하는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지성과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은 철학 또는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존재의 목적을 탐구하는 긴 여정을 걷고 있다. 출발지로부터 매일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는 우리가 깨달은 유일한 믿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