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다, 내리다, 올리다.

201X년 안산 옛 집, 2023년의 어느 날, 2024년 1월 23일

by 리르리안
이야기 1.

안산의 방 2개짜리 집에서 살던 2010년대 중반의 어느 날, 퇴근을 하고 오신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가보니 컴퓨터로 온 보안메일이 낡은 컴퓨터 모니터에 떠 있었습니다. 이미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너도나도 폰으로 보안메일을 쉽게 열어 보는 세상이었지만 저희 아버지께서 스마트 기기를 구매하신 게 코로나 사태 이후였기에, 이 당시 이메일로 온 소위 '디지털 문서'는 PC로만 여실 수 있던 것입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보안메일 암호란에 아버지 생년월일을 입력해서 보안메일을 열어드렸습니다. 내용은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스크롤이 꽤 긴 PDF 파일이었습니다. 아마 보험 내역이나 신용카드 연 단위 내역 같은 그런 것이었겠죠.

아무튼 저는 저는 그때 아버지께서 찾는 내용이 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스크롤을 '내려' 필요한 부분을 찾아드렸습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는 저보다는 꼼꼼하고, 글 같은 것은 천천히 읽어보시는 성격이셨기에 이게 썩 마음에 드시지 않았나 봅니다. 아버지께서 저한테 한 마디 하셨습니다.


“야, 화면 좀만 내려봐라.”


저는 다 보시고 밑에 것도 좀 보시려고 한 줄 알고 스크롤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한 마디 다시 하셨죠.


“아니, 화면 좀 내리라니까.”
“내리라고요? 내렸잖아요?”
“아니, 화면 좀 내리라고…”


아버지는 답답하셨는지 마우스를 뺏으시고는 휠을 굴려 화면을 ‘올리’시더라고요. 그러다니 내용을 천천히 읽으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니까 말로는 하지 못했지만, 당시에 든 생각은 이거였습니다.

'아니, 이건 화면을 ‘내리는’ 거지 어떻게 이게 ‘올리는’ 거예요?'


이야기 2.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저는 TV 예능을 참 좋아합니다. 물론 요즘은 유튜브 콘텐츠가 상당히 양과 질 모두를 압도하고는 있지만, TV 예능의 재미는 유튜브와는 다른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코로나19로 인해 예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참 아쉬웠는데, 어느새 방송가에서도 일반적인 예능은 물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을 매개로 한 예능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뭐, 굳이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연예인들이 나와서 재미있는 상황을 만드는 걸 보는 것 자체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무한도전>이나 <1박2일> 같은 예능 말이죠. 이제 데뷔하는 소위 4~4.5세대 아이돌 멤버들이 <무한도전> 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있다고 하는데, 참 세월이라는 걸 이런 데서 느낍니다.


다시 돌아와서, 최근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근래 재미있게 본 예능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구오락실>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1박2일> 시즌 1부터 <신서유기>를 거쳐 지금 <지구오락실>까지, 좋아하는 예능이 한결같은 것 같네요. 아무튼, 이 프로그램에서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 언니가, 뭐(사진을) SNS에 올리고 싶었는지 ‘너랑 둘이 찍은 셀카가 있으면 보내 줘’라고 해서, 갤러리를… 저희가 태국 갔다 온 지 좀 됐잖아요? …. 올려, 올려, 올려, 올려 찾았어요! 어우 언니랑…”


저는 이 장면을 보고 귀와 눈을 살짝 의심했습니다.


'갤러리의 화면을 ‘올려’ 사진을 찾았다고? 왜지?'
'갤러리 밑에 있는 사진을 보려면 화면을 ‘내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생각을 하며 장면을 다시 돌려보니 그녀의 제스처가 보이더군요. 스마트폰으로 화면을 터치해서 위로 ‘올리는’ 모습. PC보다 스마트폰이 더 자연스러운 소위 ‘엄지족’에게는 손가락을 ‘올려’ 사진을 찾는 게 당연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도, 스마트폰이 당연해진 젊은 친구들도 아래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선 화면을 올리게 되지만, 제 또래들은 아래에 있는 화면을 보기 위해 스크롤을 내리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화면을 내린다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상합니다. 제가 ‘신세대’ 였을 때는 화면을 올린다는 표현은 ‘구닥다리’ 표현이었는데, 기술의 발전은 화면을 직접 만져서 화면 안의 내용을 조종하는 세상이 되었고, 그렇게 그 ‘구닥다리’ 표현은 ‘신세대’의 표현이 되었고, ‘끼인 세대’로 나아가는 우리의 말은 ‘구닥다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 우리 세대가 잘못 표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확실히 스크롤을 내리면 사실 화면은 올라가며 아래에 있는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요. 우리는 화면 맨 오른쪽에 있는 '스크롤 바'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화면을 내린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내려간 건 스크롤 바였을 뿐이고 우리가 보는 건 스크롤 바를 내린 위치에 해당하는 화면이었습니다. 스크롤 바를 내리면서 화면을 끄집어 올린 것입니다. 마치 도르래와 같이 말이죠.


그리고 아버지도, TV 속 여자 연예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화면'을 '올려' 달라고.




오늘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제가 가진 상식이 상식이 아니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당연하게 여겼던 ‘혀의 맛 지도’가 사실은 허구였던 것처럼 말이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기만의 사고에 갇혀 소위 꼰대 같은 말을 하게 되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그리고 평생 열린 마음과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리르리안.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에세이란, 술 마시고 나눈 잡담을 글로 쓰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