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7 발행글. ……여담이지만 놀랍게도 현재 감기에 걸려있고 약은 먹고 있지만 거의 낫고 있었고 컨디션이 많이 나아진 상태다. 이 글을 적은 시기와 매우 흡사한 상태와 패턴임을 확인했다.)
보기 좋게 감기에 걸렸다. 머리는 어제부터 지끈거리고 아파져서 오늘은 깨질 듯이 아팠는데 일어나자마자 간단한 요기를 하고 판피린 병을 땄다. 소감은 판콜에스보다 맛있다. 그리고 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말끔했다. 감기약을 먹고 따뜻하게 푹 자서도 있겠지만 비타민C도 같이 먹어줬다. 비타민C가 몸의 면역력도 올려준다고 들어서 감기기가 있으면 무조건 감기약도 먹고 비타민C를 잘 챙겨 먹었다. 평소에도 먹어주면 좋지만 잊을 때도 많았다. 그래도 감기에 걸리면 꼭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머리가 말끔해진 생각 사이로 어제 마지막 날이었던 투고 이벤트가 생각났다. 보기 좋게 하지 못했다. 머리를 쓸 수 없었고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금 고민하다가 시간만 버리는 것 같아서 놔버리고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게 있었다.
물론 그때그때 해야 했던 매일 하는 단순하게 할 수 있던 작업들은 꼭 해야 했기에 틈틈이 조금씩 하면서 많이 쉬어주는 식으로 진행해서 어떻게 겨우 끝내기는 했다.
이제 머리가 회복되었으니 왜 못했을까? 간단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상금을 받고 싶었다. 잘했다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고,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게 하려고 준비만 잔뜩 했다.
왜 이렇게 됐냐? 비축분이 없었다. 그게 퀄리티가 낮든 허접하든 별로이든 간에 비축분이 있었다면 이제 와서 거창하게 평소보다 잘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욕심이 나도 평소 하던 대로 하는 것에서 조금 더 돋보이게 하려고 수정을 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쓰는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비축분이 없었고 너무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갑자기 치솟아서 거기에 져버렸다. 만약 이번에 아프지 않았어도 용두사미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그렇다고 안 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차라리 잘됐다. 투고 이벤트가 끝났기 때문에 부담감이나 컨셉과 글자 수를 내려놓고 편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오래 지속하기에는 그만한 게 없지. 초심으로 돌아가서 계획을 조금 더 수정한 후 바로 돌입할 생각이었다.
이전에 드라마에서 봤던 명대사 중에 아직도 인상 깊은 말이 있다. 당신의 꿈과 계획이 실패했으니까 이제 방법이 없으니까 그만 포기하라는 말에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는 항상 실패하면 포기하고 그만두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주변 사람들이 다 왜 가만히만 있냐고 할 때도 그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별말 없이 초심을 되찾기 위해 잠도 푹 자고 멍하게 있기도 하고 멀리 한적한 곳에 쉬었다 오면서 자신을 회유하러 온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 포기할 것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인상 깊고 소름 돋는 말이었다. 쌓은 게 많을수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 같으니까. 돈과 명예, 나에 대한 평가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공들여 쌓아 왔던 기틀을 스스로 폭삭 무너뜨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했어도 그래도 해야 한다면 해야 하는 거기는 했다.
이번 실패에서 내가 느꼈던 건 ‘비축분이 없었다.’였다. 기준을 낮춘다면 못해도 글 하나 정도는 적을 수 있었고 그림 하나 정도는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쌓이면 돈이 된다.
실패도 성공도 하나의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실패도 성공도 하나의 지표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계단이지.
너무 기뻐할 것도 너무 슬퍼할 것도 없었다.
실패든 성공이든 거기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게 좋겠다. 그거 전부 발 디딤대니까, 우리가 해야 할 건 사뿐히 밟고 저 앞에 보이는 조금 높아 보였던 담을 넘어가는 일이다.
발 디딤대 없이는 넘어갈 엄두도 못 냈겠지만 그걸 밟고 점프하면 넘어갈 만한 크기의 담이었다. 저 너머의 아주 거대하고 높은 담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된다. 바로 앞에 있는 담들만 하나씩 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달해 있을 거고 그 거대한 담은 내가 비벼볼 만한 애매한 크기의 담이 되어있을 테니까. 그러니 이번 패착은 경험으로 남을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