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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Nov 17. 2018

9- 첫 번째 공동체; 양평, 개척자들

무척 재밌는 부부가 살고 있고 얘길 나누러 자주 손님이 오는 곳에 관하여

6월에 있었던, 우리 여행의 첫 번째 공동체 개척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개척자들 소식지 7.8월호에 실린 글이기도 합니다.


<무척 재밌는 부부가 살고 있고 얘길 나누러 자주 손님이 오는 곳에 관하여>  


 “우리 진지하게 한번 만나 볼래요?”


 지금의 배우자가 애인이 될 적에 저리 말했었다. 이 년쯤 지나 나는 청혼을 했고 저 말을 패러디했다.
“우리 진지하게 한번 살아 볼래요?”


 지지난 달에 결혼했다. 그건 어떤 과정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며칠 뒤에 세계 여행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여행에 굳이 결혼이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여러 사람을 설득하기 버거웠다. 또 둘은 아주 오래 사랑하고 곁에 머물기로 했다. 그래서 결혼을 선택했고, 한 달 뒤 여행을 시작했다.


 우린 보통의 관광을 하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보다 적은 돈으로 더 많이 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보고 싶은 건 각 나라의 랜드마크가 아니었고 바글바글한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줄곧 같이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왔다. 일그러진 가족 이데올로기가 넓고 깊숙이 스며 있는 이 세상에서 나고 자랄 때부터 부채와 부채감을 등에 지고 사는 이 세상 다수의 사람들과 나와 너의 대안을 찾고 싶었다. 일부러 누군갈 낳고 돌보지 않아도 충분한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러니까 세상의 공동체를 살피기로 했다.


 처음 간 곳은 양평의 개척자들이다. 무척 재밌는 부부가 살고 있고 얘길 나누러 자주 손님이 오는 곳. 열두 밤 정도 머물렀는데 아직도 이곳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여기선 손으로 하는 일이 많다. 밥과 집도 손으로 짓고 형광등 덮개도 손으로 만들고 해금도 손으로 연주한다. 중요히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손으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밥이나 집을 지을 줄도 모르고 형광등 덮개나 해금 중 어느 것도 손으로 할 줄 몰랐다. 무척 무능했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여기 있는 두 사람을 송 선생님과 조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송 선생님은 집을 짓고 형광등 덮개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또 결심에 능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한 번 결심하면 그대로 움직였다. 대학 시절 조 선생님에게 반한 뒤에 그의 곁에 있으려고 같은 전공으로 전과해 버린 얘기나 예수와 평화에 온 몸을 빠뜨린 삶이 그렇다. 그렇지만 결심하지 않은 것들에는 무척 유연했다. 부활을 믿기로 결심해서 달군 부지깽이로 가슴에 부활이란 글자를 새기려고 하다가 두 획 긋고 포기한 얘긴 너무 웃겨서 생각할 때마다 웃는다.


 개척자들에 관해 묻는 사람들에겐 ‘분쟁 지역에서 평화 사역을 하는 활동가 공동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그렇지만 여기 사람들의 푹 젖은 삶은 위 구문이나 다른 긴 문장으로 풀기 어렵다. 쫓겨나고 죽고 다치는 곳에 간다. 살고 기도하고 먹는다. 도서관을 만든다. 쫓겨나고 다치는데 ‘평화 도서관’이라고 이름 붙인다. 결코 치열하지 않기로 했는데, 쫓겨남과 죽음과 평화가 쏟아지는 여기서 난 어째야 하나. 그 생의 형상 앞에서 줄곧 민망하고 부끄럽고 벅찼다.


 머무는 중에 통일을 위해 무얼 할지 얘기 나눌 시간이 있었다. 조 선생님은 통일을 위해 밥을 짓겠다고 했다. 무척 감동적인 말이었다. 조 선생님은 하루 세 번 손으로 밥을 하는데 그럼 하루 세 번 통일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 거다. 그는 하루 세 번씩 살아내는 힘과 움직임을 식탁에 올린다. 조그만 평화가 숟가락과 젓가락에 올라간다. 사람들은 그걸 꼭꼭 씹어 몸속으로 넘긴다. 그런 식으로 하루 세 번씩 평화가 일어나면, 어쩌면 그 덕에 통일이 더 당겨질 수도 있다.


 조 선생님은 감동스런 사람인 동시에 감동을 잘하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감동적인 말을 할 때면 울먹이곤 했다. 정권 바뀐 이야길 할 때도 울음을 머금었고 하루 세 번 하는 기도 모임에서 가자 지구 이야기를 읽을 때도 울어서 송 선생님이 대신 읽었다. 나는 그 모습을 꼭 물풍선 같다고 여겼다. 물 같은 순수가 마음에 가득해 작은 구멍으로도 감동이 삐죽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게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아 내내 조 선생님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이따금 발바닥이 아팠는데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서 내 마음도 아팠다.


 일 층 식탁은 볕이 잘 드는 데에 있다.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거기서 먹는데 식사 시간이면 한 시간 반이 넘게 얘길 나누곤 했다. 제일 많이 나눈 건 아이들에 관한 얘기였다. 십수 년 전 이야기인데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처럼 가깝고 생생했다. 한별과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의 아이가 사실은 나보다 더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게 너무 이상했다. 만약 실제로 만난다면 꼭 연예인이나 유명 작가를 만난 느낌일 것 같다.


 나와 내 배우자가 아이를 낳거나 돌볼 계획이 없다는 얘길 하니 여러 방식의 가족과 육아 형태에 대해 듣게 되었다. 중국에서 열세 명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살고 있는 사람, 아이를 입양하거나 낳아서 몇 사람과 함께 돌보고 교육하는 모임, 그리고 송 선생님과 조 선생님의 이야기. 각자 다른 방식으로 더 어린 생에게 헌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이 나고 자라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흙이나 안 씻은 손이 생각보다 그렇게 더러운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보다 그렇게 더럽지 않은 것이나 생각보다 훨씬 놀라운 것이나 벅찬 것이나 멋진 것은 두 번째 여행지 이곳 태국에도 많다. 결혼에 대한 후회와 후회 없음이 매 순간 엉키고 생각보다 이러이러한 것들과 같은 재미들이 길 위에 뿌려져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가는 중에 개척자들을 떠올려 쓴다.


 닮고 싶은 사람들과 열두 밤을 같이 한 일은 조금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여행이 끝나면 얘길 나누러 자주 오는 손님이 되어 송 선생님이 지은 집에서 조 선생님이 지은 밥을 먹고 싶다.


-18.7.9 태국, 카오산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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