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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Nov 17. 2018

3- 싸운 밤에는

 무서운 게 많은 채로 산다. 으레 사람들은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이야.”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많이 있다. 무서운 것들의 공통점은 깜짝 놀래키거나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것에 있다. 또 혼자인 줄 알았지만 혼자가 아닐 수도 있거나 혼자가 아닌 줄 알았지만 혼자일 수도 있는 것도 그렇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건 깜깜 함이다. 깜깜한 데에선 귀신, 벌레, 곰, 호랑이, 좀비, 들개, 귀신이나 좀비로 변한 배우자와 같은 것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안심할 것은 활짝 열린 방문과 빈틈없이 안길 수 있는 사람이다.


 연애할 때 해둔 약속이 몇 개 있다.
‘모든 밤 내가 화장실에 갈 때 적극 같이 가 주기’가 대표적이다. 내가 뭘 무서워하는지 알고 왜 무서워하는지 이해하는 사람하고 여행길을 떠나서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는데 어젯밤엔 아니었다.

 임수정 배우 주연의 영화 <당신의 부탁>을 봤다. 한국말을 하는 영화가 보고 싶단 말에 너는 복숭아색 커튼으로 스크린을 만들고 적당한 높이에 빔프로젝트를 놓았다. 빛은 한 시간 반 정도 영화가 되었고 마지막 장면은 무서웠다. 너는 연화가 종욱에게 자신이 친엄마라고 거짓말하는 거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죽은 종욱의 친엄마가 점쟁이인 연화에게 빙의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해석했다. 연화 역을 맡은 김선영 배우의 눈동자는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갔는데도 복숭아색 커튼에 둥둥 떠 있었다.


 불을 켜면 환해지는 걸 알지만 깜깜한 와중에 팔을 뻗기는 무섭다.
“불 켜줘.”

 너는 억울하다. 스위치는 나한테 더 가깝고, 영화를 틀어 준 것도 오전에 새 휴지를 사 온 것도 모두 너의 노력이라서.

 나는 무섭다고 생각할수록 무서워진다. 배우의 눈동자는 계속 둥둥 떠 있고 복숭아색 커튼은 바람에 부풀어 팔을 자꾸 건드린다. 한국말을 하는 한국 사람이 움직이던 빛은 이제 그냥 푸르스름한 네모 모양이다.

 너는 계속 억울하다. 결국 불을 켰지만 화가 난다. 나를 위해 했던 것들이 하나씩 치사하게 떠오른다. 나는 왜 무서운지 설명하면 온 몸으로 무서워질 게 분명하다. 그걸 설명하기만 하면 너는 이해하겠지, 그럼 빈틈없이 날 안아줄 거고 약속대로 화장실도 같이 가 주겠지.

 그래도 말 안 한다. 너를 등지고 누워 몰래 운다. 팔에 닿는 복숭아색 커튼 때문에 가끔 소스라친다. 열 개도 넘는 방 불을 다 켜가면서 두 번이나 혼자 화장실에 다녀온다. 다시 누워 무서운 게 많은 생을 탓한다. 겁 많고 쭈뼛대고 쉽게 얼어붙고 울고 놀라는 생을 있는 힘껏 싫어하면서 주먹으로 침대를 픽픽 친다.


 보잘것없다. 이 모든 무서움과 생과 다툼이, 그리고 안심까지도.


-18.7.14 세 번째 길/인도, 오로빌(Aurov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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