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편의 짧은 희곡이 틈 없이 이어진다. 일상과 같은 이야기를 그리지만 그것은 자꾸만 교란된다. 그 교란을 읽으면서 나는 글쎄, 하고 생각한다. 교란되는 일상이 진짜 우리 일상이기도 하니까. 이 짧은 희곡들은 익살극이라고 불린다. 갖은 픽션으로 과장된 상황과 인물들이 내게는 어딘지 짙은 논픽션으로 와 닿았다. 픽션 같은 내 진짜 일상 때문이려나.
예측할 수 없어 무력하지만 끊임없이 뜻밖이라서 또 흥미진진하다. 긴 숨을 빠르게 끊어 쉬듯 작품이 이어졌고 나는 한 편씩 정리하여 쓰기로 한다.
<평등-박애>
앙드레는 형이고 자크는 동생이다. 자크는 앙드레보다 똑똑해졌다고 형에게 말한다. 형은 치사하다. 맞장구를 쳐 주는 듯하면서 누구에게도 자크의 똑똑함을 말하지 못하게 회유한다. 자크는 그의 똑똑함을 인정해 주는 앙드레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한다. 부모와 사장에게, 자크와 결혼했다가 앙드레와 다시 결혼한 미리앙에게 그의 똑똑함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는다. 드러내 보이고 싶었지만 숨기기로 한다. 사실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부정당한다. 나는 자크의 똑똑함을 믿지 않는다. 앙드레의 비상한 치사함을 지켜본다. 평등하지 않다. 한쪽은 다른 한쪽이 모르게 그를 지배한다. 다른 한쪽은 평등한 줄 알지만 사실은 아니다. 인간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으면 기뻐한다. 그리고 때때로 지배하고 지배당한다. 나는 앙드레이기도 하고 자크이기도 하다. 치사하고 불쌍한 나, 인간.
<비극>
우리는 모두 이기적이다. 장-클로드와 루이즈는 부부이고 시몬의 공연을 관람한다. 루이즈는 시몬에게 가서 ‘브라보’라고 말하자며 장-클로드를 설득한다. 그게 예의이고, 동생을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애걸하고 달래고 화낸다. 장-클로드는 그러기 싫다. 시몬이 싫은 데다 공연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싫다고 계속 말하다가 루이즈를 떠난다. 맥주를 마시러 간다고, 그런데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고 툭 내뱉고 퇴장한다. 다시는 안 온다. 루이즈는 무너져 울고 시몬이 온다. 그가 공연이 끝난 다음에 떠나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왜 나에게 브라보를 해주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다.
다들 이기적이어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달리 방법도 없다. 저들의 욕심과 주장이 몹시 강렬하여 상처 주고 상처 받고 떠나고 남겨진다. 우스운 꼴이다. 얼마나 우습냐면 나는 남겨진 루이즈가 불쌍하지 않았다. 떠난 장-클로드도 밉지 않았고 시몬의 서운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들이 가진 모든 감정에 공감하지 않았고 웃지 않은 채로 저 우스운 꼴들을 지켜봤다. 남 일 같지 않았다.
<모니크>
아버지는 딸을 모니크라고 불러 놓고 모니크가 아니라고 자꾸만 부정한다. 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엄마의 이름은 줄곧 불러온 이름과 아예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살다 보면 이름보다 더 심각한 일이 많이 있잖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끝내는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고 하는데, 생일은 사실 다른 날이다.
이름은 그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잊은 채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아는 게 가능할까. <모니크>는 내가 부여해 온 이름에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한다. 서로를 부르고 일컫는 일이, 그러니까 이름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데에 한몫을 하던 이름과 생일 같은 것을 한 순간에 헷갈리도록 만들어 버리고 순식간에 퇴장한다. 내 입술을 움직여 소리 내어 부르던 그의 이름이 그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다. 그럼 그는 누구인 걸까. 헷갈리고 헷갈린다. 이름 없이 너를 부르는 일. 어지럽다.
<갈매기>
손님은 이발소에 머리를 자르러 와서 자꾸만 딴 소리를 하다가 이발사의 마음속 기저에 있던 꿈을 끄집어낸다. 이발사는 갈매기가 되고 싶다. 손님은 그에게 갈매기가 되지 못하도록 막는 힘을, 이발사의 삶을 살도록 만드는 힘을 추격하고 몰아붙여 없애자고 제안한다. 계획을 세우고 손님은 떠나는데 이발사는 자기가 머리를 잘라 주던 자리에 남겨진 흰 깃털을 줍는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밖에 못 사는 우리는 공중에서 날기를 욕망하곤 한다. 물 속이나 땅 속에서 살기를,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기를 욕망한다. 그래서 때때로 “다시 태어나면~”하는 주제로 말을 주고받는다. 이 희곡은 당장에 인간으로 살기를 그만두고 꿈꾸던 모양대로 살고 싶지는 않냐고 묻는다. 나는 인간을 사랑하지만 인간이 아니고 싶을 때도 잦다. 내가 인간으로 살기를 관두고 대왕고래로 살기로 한다면 나는 내 자리에서 무엇을 주울 수 있을까.
<일요일>
일요일 아침에 어마어마하게 큰 볼펜이 천장을 뚫고 집으로 떨어져 박힌다. 기독교 신자인 엄마는 지금 일어나는 이 기적 같은 일과 말들을 성서 속 이야기와 비교하거나 비유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엄마는 경찰을 부르자고 말하지만 아빠와 딸은 반대한다. 그리고 아빠는 이 일이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자기를 부르는 듯하다면서 떠나버린다. 딸은 춤을 추고 엄마는 운다.
여덟 편의 희곡 중에서 가장 어려운 작품이었다. 볼펜이 떨어졌는데 어쩌라고? 왜 다들 자꾸만 떠나는 거야, 땅에 떨어진 큰 볼펜을 이유로 떠나야겠다는 부름을 받는다고? 그냥 떠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기관지>
장과 클로딘은 부부인데, 장은 이상한 루이 15세 스타일의 가발을 쓰고 있다. 그 가발을 벗으면 흡연욕구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클로딘이 일했던 가전제품 가게에 빨래 건조기를 사러 가는 길이다. 클로딘은 멋진 장과 결혼해 당당하게 빨래 건조기를 사러 온 모습을 가게 직원들에게 보이고 싶다. 그래서 제발 그 가발을 십 오분만 벗고 있어 달라고 요구한다. 장은 그럴 수 없다. 해서 둘은 장이 영어를 쓰면 괜찮을 거라고 합의한다. 장은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문장을 영어로 말한다. “행복이란 창가에 빨래를 널어 말리는 일이다.” 그 둘은 빨래 건조기를 사러 가는 길이었다.
결국 장은 금연에 성공한다. 클로딘의 욕구도 충족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쪽에 가까워진 듯 보인다. 고집 센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다가 한 사람도 안 떠나고 끝이 나다니, 안심이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USA>
자신의 증조 삼촌이 링컨을 성폭행했고, 그의 이름이 '봅'이었기 때문에 자기를 '봅'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곧 죽어도 자기는 그를 '봅'이라고 불러야겠다는 사람도 등장한다. 웃음을 유도하는 장면이 곳곳에 있다.
나는 성폭력 사건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가볍게 풍자하거나 유머로 소비하고 싶지 않다.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감정을 느끼기를 바라는 작품인지 알 수 없었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성폭력 사건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일이 좋지 않았다.
<추억>
인간들이 박물관에서 대화한다. 인간이 물고기에서 진화한 생물이고, 진화하면서 정신이 생겨났다고. 정신은 우리를 수면 위에서 표류하게 하고 끝내 뭍으로 오도록 만들었으며 이성적 논리와 지능 같은 것은 우리의 이해력의 해를 끼친다고 말한다. 전쟁이나 탈모나 세금 같은 것은 우리가 물고기로 있었더라면 없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물고기로 살았을 때를 추억하며 되돌아 가기로 한다. 파도에 싸여 움직인다. 박물관에서 사라진다.
이 많은 작품들이 말하고 싶었던 바는 사실 <추억> 안에 응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태 진화 않고 물고기로 살았더라면 이곳 지구는 지금과 사뭇 다를 테다. 지금의 우리를 버겁게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코로나19도 마찬가지지 않았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해롭고 초라하고 거대한 우리 인간이 다시 고요하고 멋진 잉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 아직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 그 거리가 무척이나 멀어서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고요히 잉어들의 춤을 추면 조금은 돌이킬 수 있을까. 내 안에 아직 잉어의 것이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