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기로 한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미소를 띠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 형광펜을 그었다. 그 문장을 읽으니 안심이 되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서다. 날마다 불안한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이러한 바람이 마음에 들었다. 있는 힘껏 여행하고 빈둥거리고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해야지, 그리고 내 방에 들어가 글을 써야지.
저자 버지니아 울프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는 지적 자유에 관해 썼다. 책은 그것의 이유와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고 설득한다. 여성들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다고, 그래서 지적 자유가 없었다고.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방과 연 오백 파운드의 수입이 필요하다고 계속 말한다.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누이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의 이름은 주디스 셰익스피어이다. 그는 책을 읽다가 꾸지람을 들었다. 십 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약혼을 해야 했고 결혼이 싫다고 했다가 가정폭력을 겪었고 연기를 하기 위해 극장에 갔다가 모욕을 당했고 임신을 했고, 자살을 했다. 나는 이러한 역사가 무척 익숙해 딱히 분노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이해했다. 역사가 말하지 않은 여성들, 나의 시대를 사는 여성들, 내가 아는 여성들, 내가 겪은 여성들, 나의 엄마, 엄마의 엄마가 겪은 일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엄마의 엄마의 엄마도 그랬을 테다.
사실 우리 엄마는 매우 똑똑하다. 우리 엄마는 해란이다. 그는 배운 것을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고, 또박또박 글씨도 잘 쓴다. 영화 혹은 만화나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을 응용하고 요약하여 삶과 생활에 적용하는 일에 능통하다. 상대방의 말이 지루하게 늘어져도 집중의 끈을 놓치는 법이 없다. 그와 말할 때면 내 목소리가 그의 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잦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도 다들 해란을 쳐다보고 말을 이어가기 일쑤다. 뱃속 깊이 엉켜있던 나의 말들은 그의 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목구멍에서 일렬로 줄을 선다. 그것들은 내 혀의 움직임을 피해 소리를 낸다. 해란은 청소기처럼 내 말을 눈으로 빨아들인다. 그리고 완벽히 이해한다. 나는 그가 왜 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쉽고 아쉬웠다. 나는 아쉬운데 해란은 아쉽지 않다고 그랬다. 공부를 계속했으면 연애를 안 했을 거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가 계속 책을 읽고 글씨를 쓰고 토론을 했더라면 내가 안 태어났더라도 나는 되게 행복할 것 같았다.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가, 그래도 태어난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역시나 이기적이다.
해란이 똑똑하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왜냐하면 나는 대졸인데 그는 고졸이고, 자기만의 방이 없고, 자기만의 돈도 없고, 그와 나누어 온 이야기는 주로 웃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나는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내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냉철하고 슬기로운지 깨닫고 나서, 나는 아리송한 모든 것들을 그에게 묻기 시작했다. 내가 물으면 그는 현답을 주었다. 그에게 자기만의 방과 돈이 있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현자였을 지도 모른다.
나는 수입은 별로 없지만 자기만의 방은 가지고 있었다. 한 번도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적 없었다. 내 기분에 따라 방문을 잠그거나 열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안 나가거나 그 안으로 안 들어가는 일도 내 자유였다. 그러다가 나는 결혼을 했다. 그다음 세계일주를 떠났다. 내가 쓸 수 있는 방은 도미토리 룸이나 더블룸뿐이었다. 이 년째 그렇다. 사실 내 배우자 곰은 나를 응원하기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 공간은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곰이 아닌 어떤 사람들은 나를 부수적인 존재로 취급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곰의 ‘안사람’이라고 불렀다. 나와 곰은 바깥과 안으로 서로를 정의한 적이 없다. 나보고 ‘남편 따라 고생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나는 곰을 따라서 여행한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결혼을 한 뒤에 나는 누군가의 안쪽 인간 혹은 따라다니는 인간으로 불렸다. 갑자기 내가 납작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게 무슨 느낌이냐면 나는 예전에는 입체적인 인간이었는데 결혼을 하니 납작한 평면이 되어 나의 한 면만이 남들에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저들에게는 곰이 있어야 나를 부를 수 있는 걸까, 나는 절대 부수적인 존재가 되지 말아야지, 하고 자주 생각했다.
저자는 남성 서사 뒤에 부수적으로 혹은 남성에 의존하여 묘사될 수밖에 없던 여성이 남성 없이 그려지는 일을 몹시 획기적으로 여겼다. 메리 카마이클은 이런 문장을 썼다. “클로이는 올리비아를 좋아했다.” 클로이도 여성이고 올리비아도 여성이었나 보다. 여성은 여성을 좋아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이 없이도 입체적이고 복잡하다. 남성과의 관계는 기나긴 삶의 한 부분 혹은 지점이다. 또 저자는 이렇게 썼다.
“클로이가 올리비아를 좋아하고 메리 카마이클이 그것을 표현하는 법을 안다면, 그녀는 지금까지 아무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그 거대한 방에 횃불을 밝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시대에는 여성 서사가 몹시 놀랄 만한 일이었나 보다. 사실 나의 시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꼭 같지도 않다. 나는 이천 사 년부터 자기만의 방을 가졌지만 누군가의 안사람으로 설명된다. 여전하나 바뀌고 있다. 나는 거대한 방에 밝혀진 횃불에 힘을 보태기로 한다. 다른 불도 켜야지, 거대한 방을 눈부시게 만들어야지.
메리 카마이클의 글을 두고 저자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껄끄러움을 느낀다. 매끄럽지 않은 연결을 느끼고 문체에서 긴장을 알아챈다. 그리고 두고두고 읽힐, 혹은 천재가 쓴 글은 아니지만 남성에게 분노하거나 항의하는 일을 넘어 오롯하게 여성으로서 쓴 글이라는 데에 의미를 둔다. 그리고 그에게 백 년을 주기로 한다. 연 오백 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도 주기로 한다. 또 그가 쓴 것의 반을 덜어 내어 매끄럽게 하고 자기 내면을 얘기하도록 만들자고도 말한다.
나는 그 백 년의 한 부분이 되기로 했다. 자살해 버린 주디스 셰익스피어가 다시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들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온전히 나로서 쓰고 읽고 말할 수 있게, 작은 불을 들고 거대한 방에서 백 년 중 한 부분으로 자리 잡기로 한다. 해서 나는 나만의 방을 갖고 돈을 벌고 여행하고 빈둥대고 성찰하고 공상하고 배회하고 사고할 테다. 그러다가 모르는 게 생기면 해란에게 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