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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Nov 17. 2018

5- 사람하고 같이 있는 것

 사는 내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반면 세상엔 무척 많은 사람들이 산다. 가족이거나 가족이 아니거나, 아는 사이거나 모르는 사이거나, 같은 화장실을 쓰거나 아니거나, 길에 살거나 집에 살거나, 돈을 모으거나 돈을 쓰거나, 집이나 땅이 있거나 집도 땅도 없거나. 여기서 계속 살기엔 내가 너무 몰라서, 어떻게들 사는지 보기로 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계속 살 텐데 내내 몰랐다고 쭉 모르고 살 순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좀 그만 모르고 싶었다. 모여 사는 사람들을 찾아서 여행해 보기로 했다. 올해 초여름부터 공동체 기행을 시작했다.  


 축축하고 더운 우기의 태국을 지나 영적(靈的)이고 더러운 인도에 왔다. 태국에선 불교 공동체 시사아속에, 인도에선 반 백 년쯤 되었고 삼천 명이 터를 잡은 공동체 오로빌에 있다. 마감을 코앞에 두고 가만 앉아 머릿속으로 글감을 찾았다. 떠난 지 한 달인데 사람들과 삶과 앎에 대해 쓸 수 있을 만큼 겪은 게 없다. 지난 한 달, 풍성하고 생경히 보고 겪은 건 사람보다 동물이었다. 어디나 사람과 가까운 곳엔 동물들이 있었다.


-개
 
오십 년쯤 된 공동체 오로빌에 있다. 남인도 바다 마을이다. 이 나라엔 원체 동물이 많다. 소, 개, 염소, 고양이가 매인 줄 없이 길 위에서 산다. 다른 동물들은 꽤 많이 걸어 다니는 편이나 보통 개는 푹 퍼져있다. 옆으로 누워 가만히 시간을 보낸다. 내가 묵는 방은 2층인데, 여기 계단엔 검은 개가 산다. 저녁을 먹고 나가려는데 검은 개가 계단 중간에 누워 있다. 얘도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중 이려니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검은 개는 일어났다. 곧 온몸을 바쳐 짖었다. 전에 태국 밤길을 걷던 중 들개 여섯 마리에 둘러싸였다가 가까스로 벗어난 기억이 떠올라 지금 내 앞에서 힘껏 짖는 얘가 무섭다. 눈치를 보면서 한 칸씩 내려간다. 나 한 칸, 반려자 한 칸.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계단을 내려가듯 더디게, 우리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걸 검은 개가 깨닫지 못하도록 천천히. 그래도 검은 개는 다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으르렁대는 검은 개와 눈을 맞추던 중 인도인 한 사람이 다가온다. 그 사람의 일상적인 눈과 내 겁먹은 눈이 마주친다. 그가 검은 개에게 닥치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에게 오른손을 오므리고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만들어 개에게 보여주라고 한다. 이상했지만 그렇게 했다. 검은 개는 갑자기 꼬리를 흔들었다. 꼬리를 흔든다는 건 이제 나를 싫어하지 않고 좀 좋아한다는 뜻이다. 검은 개는 줄리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도 줄리는 온몸을 바쳐 방과 계단을 지켰다. 인도에서 보기 드문 집 잘 지키는 개다. 하지만 줄리는 오므린 손을 보이자마자 모든 언어와 행동을 바꾸었고 나와 반려자는 가던 길을 갔다.


-게코
 태국에선 ‘끼꼬’라고들 부르고 인도에선 그냥 안 부른다. 게코는 벌레를 먹으면서 사람과 같은 집에 사는 작은 도마뱀이다. 벌레가 많을수록 게코도 많다. 어디서 만나든 벌레는 무섭다. 각오하고 들어간 숙소에 게코가 많이 보이면 어딘지 든든하다. 그래도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흰 침대 시트에 게코 똥이 놓여있을 땐 별로 안 좋다. 새벽이나 밤에 “끼꼬끼꼬끼꼬끼꼬끼꼬끼꼬”하면서 울 때도 별로 안 좋다. 그런 날이든 아닌 날이든 잠들기 전엔 게코들에게 의지한다. “게코들, 기운 내!” 말하고 잠든다.


-고양이
 태국의 카오산로드엔 길고양이가 많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통통한 길고양이들이 골목마다 누워 있다. 날이 더워 다들 퍼졌다. 어떤 날은 방콕의 수상 버스를 탔다. 마을의 폐수가 흐르고 고이는 운하를 항로로 운항하는 보트였다. 얼굴에 물이 튀지 않게 각별히 주의하면서 버스를 이용했다. 운하를 따라가다 내렸다.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정거장에 서서 한참 기다리다 내가 말했다. “거북이다!” 검은 거북이가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물결을 따라 점점 가까이 흘러왔다. 검은 거북이가 내 앞까지 왔을 때, 그게 검은 거북이가 아니라 죽은 새끼 고양이인 걸 알았다. 물에 머릴 박고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고양이 같았다. 그렇지만 죽은 지는 꽤 되었는지 배가 빵빵하게 부풀었다. 이 길 어딘가에서 굴러 떨어져 물에 빠졌겠지, 기어 나갈 순 없었을까, 아무것도 없었을까. 사람이 만든 그 운하는 시멘트로 이루어져 있었고 완만한 곳은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고양이가 딛고 나올 만한 게 아무 데도 없었을 거다. 산 고양이들에게 미안했고 죽은 고양이에게는 더 미안했다.


 가만 생각하니 고맙고 짠하고 속상하고 아프다. 아무래도 사람이 없으면 더 평안할 동물이 많다. 내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폐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벌레를 잡고 고기를 먹고 배를 타고 모기향을 피울 오늘 내일 모레가 죄스럽다. 매일 생을 빼앗기는 저들에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내 살아있음이 오만일 것 같아서.


-18.7.31 인도, 오로빌(Aurov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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