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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Mar 18. 2024

회사에서 '나'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

사내 정치는 글로벌 공통점?

지난주는 해외 본사에서 여러 명의 하이레벨(그야말로 사장보다 더 높은 양반들)이 한국을 방문해서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오라고 초청한 적도 없는데 여러 명이 번갈아가며 참 많이도 왔고, 앞으로도 계속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에 기회가 많다는 핑계로 오는 건데, 올 때마다 한국 직원들은 준비 때문에 몸살을 앓을 지경이다.


해외 본사의 실무진이 오면 고객과 미팅할 때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 회사는 첨단 기술로 B2B 거래를 하는 회사이다. 그래서 그 기술의 핵심을 알고 있는 본사 직원의 노하우가 고객사에게 꼭 필요한 지식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하이레벨이 온다면?

기술도 몰라, 실무도 몰라, 고객 방문의 뚜렷한 목적도 없어.... 그야말로 왜 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하이레벨의 시선에서 한국팀이 잘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판단할 목적이 제일 크리라 짐작만 해본다. (하아... 제발 더 이상 쓸데없이 안 왔으면 좋겠지만, 마음속으로만 소심하게 외쳐본다)


이번에는 평소와 다르게 하이레벨에서 한 명을 더 데려온다고 했다. 

3년 전 새로 글로벌 CTO(Cheif of Technical Officer, 최고기술책임자) 직책을 뽑았는데, 그 담당자와 같이 와서 한국의 주요 고객사와 기술 협력 기회가 있는지 찾아볼 목적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나는 어쩌다 보니 CTO와 함께 이틀간 고객사 방문과 세미나를 같이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이 중요한 시기에 그의 노트북이 작동하지 않아, 내 노트북으로 그의 발표자료를 띄우고 보조 역할을 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그와, 그리고 같이 온 하이레벨들과 지난주 함께 하며 여러 가지를 느꼈다.

축약하자면 대략 아래의 감정이랄까?

글로벌 하이레벨들은 회사 영상에선 참 인자해 보였는데 아니었구나 (사장님들은 다 똑같이 무섭더라)

글로벌 팀에는 정치가 없을 줄 알았는데, 더 심하네? 

어디에서나 매출과 실적에 대한 압박은 엄청난 거였구나

고객에게 가치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제품을 판매해서 이익을 내는 게 회사의 숙명이구나

리더들의 대화는 멋질 줄 알았는데, 사적인 대화는 만국 공통 똑같구나


나와 같이 했던 CTO는 최고기술책임자답게 많은 지식과 인사이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같이 왔던 보스는 매출과 실적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이 느껴졌다. 겉으로는 회사의 가치를 CTO를 통해 높인다고 했지만, 그에게도 세일즈와 동일한 잣대로 얼마만큼의 기회 요소를 창출했는지 미팅마다 물어봤다.




이틀간 CTO와 쉬는 시간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어떻게 이 회사에 조인하게 되었는지부터 자녀 교육법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했다. 우리에게는 아침 차량 동승부터 저녁 식사 자리까지 시간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내가 이 조직에서 글로벌 CTO와 이렇게 사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해외 본사에서 누군가가 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였지만, 이렇게 사적인 대화를 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도, 나도 진심으로 서로를 대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예상했던 바와 같이, 보스에게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천성이 순수한 과학자이다. 그리고 여기에 겸손함과 진실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성향은 비즈니스맨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계 회사인 우리 회사에서는 실적, 효율, 환경변화에 맞춘 발 빠른 조직 변화 등이 필수이다. 그래서 아무리 기술과 가치를 고객에게 주며 인지도를 높인다 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바로 아웃이다.

그의 보스는 인자한 웃음 뒤로, 그에게 다각도의 압박을 가했다. 고객사 미팅이 끝나자마자 숨 쉴 틈도 없이 다다다 쏘아붙이며 오늘 미팅은 어땠고 너는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다. 동승한 차에서도 옆에 앉아 계속 일 얘기만 했다. 듣는 내가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는 단 하루, 그의 보스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지 않았던 그날 가장 행복하다 말했다.




그와 함께하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는 이번 아시아 방문이 인상적이었다며, 미국이 아닌 아시아에서 살고 싶다 진지하게 말했다. 인도에서 태어나 다시 인도로 relocation을 하며, 아시아 지역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단다.

보스로부터 벗어나, 고객에게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제공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서 그동안 잊혔던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나보다 10살은 더 많을 것 같지만, 고객과 팀을 위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있었다.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했으며, 그것을 위해 보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잃지 않았다.


회사에서 오롯이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고되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잃지 않고 직장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회사와 보스와 싸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지난 몇 주간 사장님이 시킨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며 현타가 세게 왔었다. 회사를 위한 개가 될 것인지 나로 살아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생각했다.

결국 내가 싫으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내 선택을 못 내렸지만, 멀리 미국으로 돌아간 CTO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본다.

그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그 자신으로 이 조직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기를. 아니, 그가 우리 회사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를 말이다.



#몹쓸 글쓰기 #몹시 쓸모 있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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