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애정해 마지않았던 넷플릭스와 드디어 이별을 고했다.
모든 만남의 끝엔 헤어짐이 있듯, 언젠간 우리가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이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2년 전 천사 같은 직장동료의 계정 나눔으로 드디어 만나게 된 넷플릭스는 나에게 신세계였다.
아니, 이런 매력덩어리 녀석을 왜 이제야 만났지! 조금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게 아쉽기까지 했다.
스마트폰 안에서 펼쳐지는 나만의 새로운 세상.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녀석을 불러 실컷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우리의 데이트 시간은 주로 평일 출퇴근 시간을 피한 아침 일찍이나 밤늦게였는데, 출근이 너무 싫어 눈을 뜨지 못하는 나를 위해 즐거운 콘텐츠를 재생해 주었고, 늦은 밤 퇴근한 내가 침대에 누워 잠들 때까지 그 즐거움을 함께 했다.
물론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그 녀석의 가장 큰 경쟁자인 나의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수시로 한심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퇴근 후 샤워할 때조차 그 녀석과 함께 하며 재밌어하는 내 모습에 질투가 났나 보다.
생각해 보니 평일뿐 아니라 주말에도 우리는 종종 같이 시간을 보냈다.
주중에는 남편이 집안일을 전담으로 하고 있어 마지막 남은 양심상 주말 밥상 정도는 내가 책임지고 있는데, 요리와 설거지 시간에는 항상 그 녀석이 나를 지치지 않고 집안일을 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다.
나는 20대 시절부터 미드(미국 드라마)에 빠져 지냈다. 혼자 자취를 하며 시간이 남아돌았던 나에게 미드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첫 미드와의 만남은 대학원 졸업 무렵. 전공 특성상 밤늦게까지 실험을 하며 실험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이 생기는데, 하루는 대학원 선배가 이 시간 동안 실험실 컴퓨터로 미드를 보고 있던 것을 발견했다.
당시 선배가 보던 미드는 마이클 스코필드 주연의 '프리즌 브레이크'였다.
나 말고도 이 장면을 목격한 실험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점점 선배의 컴퓨터 앞으로 몰려들어 같이 보게 되었고, 이때까지 전혀 미드에 관심이 없었던 나까지도 흥미진진한 미국판 탈옥 스토리에 완전히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 이 미드는 너무 인기가 높아, 심지어 주연 배우에게 '석호필'이라는 한국식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물론 우리 실험실 여자 사람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미드 세계로의 입문은 프렌즈, 위기의 주부들, 섹스 앤 더 시티 등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미드를 보기 위해서는 매번 금액 충전을 하고 다운로드를 하여 커다란 노트북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매번 감질맛 나도록 조금씩밖에 보지 못하였다.
OTT 서비스의 시작을 알린 넷플릭스와의 만남은 나의 미드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갈증을 풀어주기 충분했다.
첫 콘텐츠를 골라 시청하고 나니 척척 내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들을 자동으로 추천해주기까지 했다.
눈치 빠른 그 녀석은, 내가 그동안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검색을 통해 어렵게 찾던 콘텐츠들을 내 눈앞에 바로바로 내놓았다. 마치 내 마음에 들어와 마음을 읽은 것처럼 행동하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랑에도 주기가 있듯, 나에게도 그 녀석과의 권태기가 찾아왔다.
매일 맞춤으로 추천해 주는 콘텐츠는 이제 너무 뻔해 예측이 가능했고, 매번 보니 질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과 나 사이에 새로움과 짜릿함이 없어지고 안정이 생기자, 흥미와 재미가 급격히 떨어져 버렸다.
이런 나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그 녀석은 지치지도 않고, 종종 이 세상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콘텐츠를 선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만 잠시 그 녀석을 조금 예뻐해 주다가 이내 서서히 외면하게 되었다.
그 녀석과의 이별은, 시어머니와도 같은 넷플릭스 본사의 계정 공유 정책 변경 통보로 갑작스레 찾아왔다.
비록 요즈음 그 녀석과 권태기였긴 해도 막상 헤어지려니 아쉬운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컸다.
과연 내가 그 녀석 없이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보내줘야 할 때임을 알기에, 마지막으로 그동안 나를 웃고 울게 만들어준 그 녀석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나는 그 녀석과의 헤어짐 이후의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해보려고 한다.
얼마 전 출근길에서 본 자기 계발 동영상에서, '당신은 한 달에 몇 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는데,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제대로 못하겠더라.
9월부터 두 달간 딸랑 책 1권 읽은 게 다인데, 여태까지 넷플릭스와 데이트하느냐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을 너무 멀리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번 이별을 계기로, 책과 나의 만남 시간을 조금씩 늘려보려고 한다.
사실 매일 머리맡 테이블에 책을 1권씩 놔두고, 자기 전 읽어야지 결심만 하다가 항상 넷플릭스에 밀려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나를 위한 책 읽기를 실천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요즘 조금씩 재미를 붙인 글쓰기 시간도 늘려보려고 한다.
넷플릭스는 자석같이 내 손과 마음에 붙어 떼내는 게 쉽지 않았는데, 책 읽기와 글쓰기는 내가 의도적으로 굳게 마음을 먹고 다가가지 않으면 쉽게 멀어지더라.
나에게는 아직 책상에 앉는 것도, 책을 펴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모두 결심과 의지가 필요한, 내가 원하면 다가갈 수 있지만, 잘 원하게 되지 않는 그런 사이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나에게 얼마나 큰 성장과 삶의 의미를 주는지 잘 알기에, 그리고 내가 원하는 나의 인생을 주체성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앞으로 앞으로 그 둘과 조금 더 친하게 지내고자 한다.
넷플릭스와 이별하며 앞으로 더 시간을 많이 보낼 책과 글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안녕, 반가워'라는 인사를 건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