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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Dec 06. 2023

나에게 첫눈은

T와 F 사이 그 어딘가

평소보다 빨리 내린 올해의 첫눈 소식은 나에게,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다양한 기억을 소환하고, 그리운 추억들을 불러일으켰다.


꼬꼬마 어린 시절 첫눈은 '동심' 그 자체였다.

강원도의 겨울은 빨리 찾아왔고, 첫눈 내리는 날부터 봄이 찾아오는 날까지 항상 눈을 장난감 삼아 친구들과 놀고는 했다. 춥고 긴 시골의 겨울, 아이들에게는 눈이 진정한 놀거리였다.

눈사람을 누가 크게 만드는지 내기하고 편을 나눠 신나게 눈싸움도 했으며, 혀를 날름거리며 내리는 눈을 받아먹기도 했다.


조금 더 큰 10대 학창 시절의 첫눈은 '감수성'으로 기억된다.

별것 아닌 작은 일에도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우리에게, 1년에 딱 한번 찾아오는 첫눈 오는 날은 그야말로 빅 이벤트였다.

학교 창밖으로 첫눈을 누가 먼저 발견하기라도 하면, 다들 꺅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좋아라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만큼은 공부에 찌든 입시생이 아닌 첫눈을 보며 감탄할 수 있는 문학소녀가 될 수 있었다.

아마 첫눈 오는 순간 국어선생님이 첫눈에 대한 시를 쓰라는 숙제를 주었으면, 다들 한두 줄씩 써 내려갈 수 있을 만큼 마음속에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시기였다.


20대의 첫눈은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에 들어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유분방하게 놀던 시절, 친구들과 종로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지하철이 끊겨 다 같이 자취방이 있는 청량리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갑자기 내린 첫눈이 쌓이기 시작해 집까지 향하는 길이 험난했지만, 짝사랑하던 그 애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걸을 수 있어 좋았다. 이날 무려 4시간이나 걸었지만 힘든 기억이 아닌 설렘의 기억이 더 남는 걸 보면 사랑의 힘은 그 어떤 것보다 센가 보다.


가정을 꾸린 30대의 첫눈은 '아이'와의 추억으로 채워졌다.

어쩜 전 세계 지구별 아이들은 다들 눈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아이는 겨울만 되면  빼꼼히 고개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오늘 눈이 내리는지 수시로 확인하곤 했다.

드디어 눈이 내린 날에는 놀이터로 나가 남편과 함께 아이를 위해 눈썰매도 끌어주고 눈오리도 만들며 우리 가족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추울까 봐 패딩과 모자, 목도리로 칭칭 싸매고 두꺼운 장갑까지 끼워주면 마치 집오리처럼 뒤뚱뒤뚱 걸으며 눈을 밟고 다녔는데 지금도 그 귀여웠던 모습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지금 40대인 나에게 첫눈은 무슨 의미일까?


얼마 전 회사 동료들과 통창이 있는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그때 내리는 첫눈을 우연히 발견했다.

재밌게도 함께 있던 6명의 첫눈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너무 좋다고, 올해 처음 눈을 본다며 즐거워하는 동료도 있었고, 눈에 갇혀 길에서 8시간을 있었던 동료는 눈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리끼리 반응을 분류해 봤는데, MBTI의 T(Thinking)와 F(Feeling)의 첫눈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T 성향의 동료는 눈이 오면 차가 더러워질 것이라고 얘기했고, F 성향의 동료는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얘기했다.


사실 나도 첫눈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도 먼데 이따 퇴근할 때 길 막히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가장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떠오르는 것은 눈이 내려서 세상이 좀 더 포근하고 깨끗해지겠구나 하는 감정이었다. 아마도 나는 T와 F사이 어딘가에 머물고 있나 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현실주의의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주의는 생존에는 탁월한 강점을 발휘할 수 있지만, 항상 이 필터를 끼고 있으면 세상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세상에 대해 즐겁고 감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나의 40대 첫눈에 대한 정의는 내리지 못했지만, 현실주의자의 시선을 내려놓고 조금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50대와 60대의 첫눈은 나에게 무엇으로 다가올지 기대해 본다.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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