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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Dec 12. 2023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니!

청천벽력 같던 헬스장 공지사항

나의 평일 일상은 헬스장으로부터 시작된다.

5시에 눈을 떠 씻지도 않은 채로 운전을 해서 회사 근처 헬스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약 6시 정도.


다른 사람들은 멋진 몸과 근육을 만들기 위해 헬스장을 다니지만, 내가 올해 헬스장에 다닌 소박한 목적은 딱 하나이다. 바로 '건강해지기'.


고등학생 때부터 슬슬 시작된 허리 디스크는 조금만 방심하고 오래 앉아 있는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다시 통증이 도지기 일쑤다. 보고서와 프로젝트로 날마다 이어진 야근 때문에 결국 허리에 무리가 와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되어 시술을 받았다.

시술을 받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조금 지나면 다시 살만해진다. 아! 통증만 없어도 이 세상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고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긍정 충만한 느낌으로 나는 올해도 회사에 오래오래 머물며 미팅도 하고 야근도 하고 밥도 먹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예전에 느꼈던 통증은 잘 기억나지 않았고, 바로 내 눈앞에 놓인 업무가 당장 급해 보여 처리하기 바빴다.

그리고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월 감기에 걸려 기침을 계속하다가, 디스크가 다시 터졌다.

기침을 오래 하면 통상 갈비뼈가 아팠는데, 갈비뼈의 통증 따위는 발톱의 때였다. 한번 기침을 할 때마다 허리가 너무 아파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고, 눈물을 흘리고 허리를 부여잡으며 기침을 하는 나 자신을 원망했다.

누워 있지도 있지도 못할 정도가 돼서야 병원을 찾고 MRI를 찍은 다시 디스크 시술을 받았다.

시술 자체는 간단했지만,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진심 어린 잔소리를 잔뜩 들어야 했다.

지금 이 나이에 이 허리라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고.


두 번째 시술로 정신이 번쩍 들었던 나는 헬스장을 열심히 나가게 되었다.

뭐 대단한 운동을 한건 아니었고, 걷기 운동이 허리에 가장 좋다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으로 하루 3km씩 빠른 속도로 걸었다.


파보니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건강'으로 급상승하며,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오롯이 나에게 투자할 수 있는 아침 시간을 온전히 할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만의 평일 아침 루틴이 만들어졌고, 외근이나 출장이 아닐 때에는 매일 헬스장에서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헬스장을 갔다가 아래의 문구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


"현재 샤워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ㅜㅜ 빠른 시일 내에 고칠 예정이니 양해 부탁 드립니다. ㅜㅜ"


눈물 표시를 무려 두 개나 달다니. 얼마나 다급했으면!


한여름에도 따뜻한 물(남편 기준으로는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나에게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뉴스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리 따뜻한 날씨라고 해도 겨울이다. 아니, 12월에 찬물로 샤워를 해야 된다고?


샤워도 하지 않고 머리도 감지 않고 헬스장부터 온 나는, 너무 당황해서 운동이고 나발이고 빨리 씻을 장소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근처 찜질방을 검색했다.

하지만 찜질방은 멀었고, 씻을 수 있는 다른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라, 글렀구나. 운동을 해서 열을 일으킨 다음에 재빨리 찬물로 씻고 따뜻한 드라이어로 몸을 말려야겠다는 다음 행동을 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빠른 달리기로 몸에 땀을 냈다. 그리고 너무나 다행히도 찬물로 몸을 씻으려는 그 순간, 약하게나마 미온수가 나와 무사히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이 당연한 루틴이 깨졌던 오늘, 헬스장에서 새롭게 느끼고 깨달았던 점을 적어본다.


 - 헬스장은 나에게 운동하러 가는 의미도 있지만, 씻기 위해서 가는 것도 있었구나 --> 다양한 복지 공간

 - 평소에 샤워를 엄청 오래 했구나 : 참고로 오늘은 중간에 찬물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해서 3분 만에 샤워와 머리감기를 모두 마쳤다 --> 물을 아껴 써야지!

 - 루틴을 깨면 나름 재미도 있구나 : 매일 당연하게 하는 일들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루틴이 어긋났을 때 스릴도 느낀다 --> 세상에 당연한 건 없으므로 감사해야겠다

 -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구나 : 매일 그냥 지나치던 다른 회원님과 온수에 대한 얘기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같이 욕을 하면서 친해질 기회를 찾았다 --> 다음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야지

 - 리스크 매니지먼트는 언제나 필요하구나 : 오늘처럼 생각 없이 그냥 나왔는데 정말로 씻지 못하고 회사에 출근할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 미리 대비책을 찾아보자


여기에 더불어 이 사건을 오늘의 글감으로 써야겠다는 이상한 설렘도 생겼다.

나쁜 일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나쁜 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통찰과 다음을 준비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며칠간은 보일러 수리로 온수가 안 나올 수도 있다는 헬스장 공지 문자를 받고 속으로 '아싸!'를 외친다. 연말이 조금 더 여유롭고 행복할 것 같다.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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