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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Jun 27. 2024

이 망할 놈의 영어

입이 있는데 왜 말을 못 하니

영어가 내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며 영어를 많이 쓰는 편이라 의사소통에 별 문제가 없다 생각했는데, 그건 명백한 나만의 착각이었다. 이메일은 거의 매일, 회화는 적어도 일주일에 1-2번을 쓰는 상황이라 영어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외국 본사에서 한국을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지, 글로벌 맛집으로 소문났나 보다. 평소 이들에게 고객사를 소개하고, 한국 고객이 원하는 것을 영어로 옮기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주에도 본사 담당자의 한국 방문 스케줄이 있었다.

사전에 일정을 조율하고 이메일로 소통하다가, 어제 한국에 도착한 그들을 안내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얼굴과 직접 맞닥뜨린 얼굴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그들은 엄청나게 높은 음로 인사를 건넸다. 분명 새벽에 도착했을 텐데 벌써 얼리 체크인을 하고 수영, 샤워, 조식까지 완벽히 끝냈단다. 유독 에너지가 높고 밝아 보였다. 호텔 입구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채 1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어찌나 얘기를 많이 하던지... 어쩐지 그들의 에너지가 채워질수록 내 에너지는 조금씩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총 3명의 담당자가 왔는데 두 명은 미국인 한 명은 인도인이다. 

역시 여러 인종이 다양하게 사는 미국 답게, 한 명의 미국인은 포르투갈 국적, 또 다른 미국인은 그리스에서 왔다고 한다. 하루를 먼저 방문한 아시아 담당자인 인도인과는 사전 회의도 하며 발음에 익숙해졌는데, 두 명의 미국인은 아직이다. 내 영어는 미드에 단련되었다 생각했으나, 드라마와 현실은 천지차이였다.

차를 타고 회의 장소까지 가는 내내 대화는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때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들은 시종일관 엄청난 에너지와 속도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각자 자기소개를 했던 같기는 한데, 운전을 핑계로 아마 나는 이름과 맡은 역할만 얘기했던 같다. 원래 말이란 주고받아야 한다. 그러나 속사포로 말하는데 따라갈 재간이 없었다. 뒤에서 누가 얘기하면, 알아들은 채로 겨우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사무실로 데리고 와 내부 회의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팀 담당자들을 소개해주고, 본격적으로 회의 주제로 넘어가려는데 질문이 훅하고 쏟아졌다. 전문적인 무언가를 물어본 것 같은데 한국팀 누구도 대답을 못했다. 아니, 서로 앉아서 눈빛을 교환하며 어떻게 답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이 시원찮자, 아시아 담당자인 인도인이 바로 끼어들었다. 한국팀을 대변하며 그와 미국인 두 명이 대화를 계속한다. 한국팀은 그때부터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한국 일정과 한국 고객사를 소개하는 자리인데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프레젠테이션에 나와 있는 정보를 읽고 나면, 그들끼리 토론하고 넥스트 스텝을 얘기했다. 

솔직히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빨리 말하는 외국인들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그렇게 느낀 것 같지는 않다. 멀뚱멀뚱 가만히 있다가, 아는 단어가 나오면 그제야 한 두 마디 답했을 뿐이다. 


미팅이 끝나고 오후에 고객사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전에 30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시차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들은 커피를 간절히 원했다. 점심시간이라 많이 붐볐지만 스타벅스를 찾아 들어갔다. 법인 카드를 들고 있는 한 명의 미국인과 함께 줄을 섰는데, 그녀는 하이톤으로 나와 동료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yeah, oh, really 등으로 간신히 반응을 해주는데 너무 피곤했다. 그러다 문득 나머지 두 명의 외국인의 메뉴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다시 그들 자리로 가서 카페라테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데, 그제야 떠오른다.

"I already know what they want" 라며 3분 전에 웃으며 말했던 그녀의 모습이. 

이렇게 말하길래 나는 'they'가 누군지도, 'want' 다음에 무엇이 오는지도 모른 채 같이 웃어줬다. 무슨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제길... 그들의 커피 메뉴를 이미 확인했다는 뜻이었다니. 


커피를 다 마시고 드디어 첫 고객사와의 미팅이 시작되었다.

어렵게 잡은 자리라 긴장되었다. 다행히 고객사에서는 친절하게 그들의 회사 소개도 해주고 추후 계획도 잘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더 다행히도 동행한 외국인들도 한국 고객사의 얘기에 충분히 귀 기울였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잠깐 멈추고 다시 확인했다.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의 입장을 천천히 말하며 전달했다. 한국팀과 미팅할 때 말의 속도보다, 최소 3배는 더 늦추는 느낌이었다.


어제 하루 동안 있었던 그들과의 한 달 같던 시간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여태까지 한국에 왔던 외국인들 혹은 콘퍼런스 콜에서 봤던 외국인들은 우리를 배려해주고 있었음을. 한국 사람들이 못 알아들을까 봐 천천히 말해주고, 우리의 대답을 정리해 주었던 것이었다. 특히나 1:1 미팅을 할 때는 더 그랬던 것 같다. 한국 사람들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들도 우리에게 맞춰준 면이 있었다. 이제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 처음 온, 오리지널 그대로의 원어민을 보니 차이가 느껴졌다. 한국에 대한 그 어떠한 문화적, 비즈니스적 배경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신들끼리 소통할 때의 최적화된 방식을 악의 없이 그대로 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말하겠지? 


지난달에 아래와 같은 글을 포스팅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rim38/164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인간의 오만함이란. 아니, 나의 오만이겠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서, 한국팀 안에서만 영어를 조금 잘하는 수준이라고 깝죽댔다. 영어를 손 놓고 안일한 자세로 살았던 나를 반성한다. 미드 시청으로 비즈니스 영어를 커버할 수 있다고 확대 해석한 것을 취소하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불변의 진리는, 영어도 소통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이번에 느꼈던 충격과 답답함은 그들과 소통 자체가 안 되었음에서 온 것이다. 나름 외향형으로 주변 사람들과 잘 이야기를 이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영어라는 필터가 씌워지니 그게 안되었다. 아이스 브레이킹이던 농담이건 다 안 됐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비즈니스 대화가 매끄럽지 않은 것이었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려면, 영어로 업무에 대한 이야기는 잘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나와 우리 팀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소통의 기본인 서로의 정확한 니즈 파악이 안 된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충격을 동기삼아 비즈니스 영어 강의를 들으며 갔다. 

발음도 좋고 속도도 적당해 훨씬 잘 들린다. 아, 배려 맞았구나. 배려의 영어에 익숙해져 몰랐는데, 일방적인 강의마저도 그랬다. 청중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속도와 전달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도 외국인과 몇 시간이나 있어야 되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것도 한계다. 어디에 사는지 묻는 질문은 어제 이미 다 끝냈다. 오늘은 취미라도 물어봐야 되나, 우리 회사에 대해 왜 왔는지 물어보는 위험한 대화를 해볼까. 

에라, 모르겠다. 여기가 정글이다 생각하고 아무 말이나 하면서 영어 공부라도 해야겠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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