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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Jul 08. 2024

사고의 유연함이 필요한 순간들

정답은 거의 '언제나'

아침 6시, 헬스장에 도착하는 시간이다.

출근 전에 회사 근처 헬스장에 들러 운동을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매일 아침 더 자도 된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악마의 꼬임을 뿌리치고 헬스장에 나오기는 쉽지 않지만, 이제 습관이 돼서 견딜만하다. 사실 운동이라 부르기는 민망하고, 30분가량 걷고 뛰며 깔짝대는 정도랄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주장해 본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눈꺼풀이 내려앉을 것 같은 날도,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 후반으로 향하는 목요일, 졸린 눈을 비비며 습관적으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가자마자 세면도구를 사물함에서 꺼내고, 옷과 수건을 챙겨 탈의실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날은 뭔가 허전했다. 있어야 될 게 빠진 느낌. 다시 눈을 크게 뜨며 찾아봤는데, 아뿔싸! 수건이 하나도 없었다. 

'수건 부족으로 1인당 1개만 사용해 주세요. 수건은 내일 오전 8시에 재입고될 예정입니다.'

전날 밤에 붙여 놓은 것 같은 메모만 덩그러니 수건함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내가 헬스장에 오는 목적 중 하나는 샤워도 있는데, 큰일 났다. 수건이 없으면 어쩌지. 아침마다 헬스장에 오기 싫을까 봐 일부러 모든 화장품을 놔두고 다닌다. 운동을 거르고 집에서 씻고 나가면, 집에 화장품이 없어 그야말로 쌩얼로 출근하게 될 것이다. 거창하지 않지만 최소한의 화장을 위해서라도(선크림, 팩트 정도)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씻고 출근할 수밖에 없게 일부러 장치를 마련해 놨다.

아무튼, 운동은 못해도 사람답게 씻고 출근해야 되는데 수건이 없다니,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러본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직원도 안 보이고 어디다 항의할 곳도 없다.


내가 다니는 헬스장은 가성비에 초점이 맞춰 있다.

비싼 강남땅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헬스장 중 하나이다. 이 가격에 헬스장을 운영하면 망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종종 이런 불편한 상황을 마주치게 된다. 한겨울 보일러가 망가져 온수가 안 나왔던 적도 있고, 6시에 나와야 하는 직원이 안 나와서 거금 2만 원을 내고 옆 건물 헬스장에 씻으러 간 적도 있다. 1년 남짓 다니는 동안 이런 상황을 4-5번 마주치고 나니, 헬스장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건이 없는 상황은 처음이라 당황했다. 외부로부터 매일 아침 수건 배달이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숨 쉬듯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의식한 적도 없다. 

어찌 되었던 나는 씻고 출근을 해야 하니, 이때부터 두뇌를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수건이 없는데 씻어야 하는 상황의 대처법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드라이기로 말리기. 샤워장과 드라이기 사이의 거리는 불과 1.5m 정도이므로 충분히 가능하다. 대신 탈의실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지겠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넘기자.

두 번째는 옷으로 닦기이다. 수건은 떨어졌지만 다행히 운동복은 넉넉히 쌓여 있다. 물기가 전혀 흡수되지 않게 생겼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2-3개쯤 쓰면,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떨어져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택한 방법은 이 둘도 아닌 다른 방법이었다. 바로 누가 쓰다 만 수건 있는지 찾아보기.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와 몸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효과적으로 닦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는 수건이었다. 헬스장에서 나눠주는 옷과 수건을 다 쓰고 모아두는 바구니가 있는데, 일단 여기를 뒤져 보았다. 위생 상태가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생존 모드가 더 크게 발동된다. 다행히 딱 1개가 남아 있는데 나름 보송보송했다. 누가 볼세라 얼른 씻고 머리에 있는 물기를 수건으로 말리니 살 것 같다. 아무래도 남이 쓴 수건은 찝찝해서, 몸은 운동복으로 닦았다. 역시나 물기는 별로 닦이지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디에 말하기도 민망한, '수건 없이 샤워하고 나오기 미션'을 끝내고 나니 한 가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유연성 : 딱딱하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성질. 또는 그런 정도

나는 파워 J의 성향으로 무엇이든 계획하고 예측하는 것을 좋아한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시뮬레이션해보고, 그 미래가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이라면 바꾸기 위해 미리 뭐라도 한다.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살면서 내가 통제할 있는 상황이 얼마나 존재할까. 운칠기삼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마 거의 없다에 가까울 것이다. 

살아가면서 이런 상황들을 여러 번 맞이하다 보니 '유연성'이 삶에서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수건이 없는 상황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고, 이럴 때 만약 유연성이 없다면?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이런 상황만 탓하면서 당황한 채로 수건이 배달될 시간까지 기다렸을 것 같다.


유연성은 회사에서도 꼭 필요한 덕목이다.

나와 약 2달간 인연이 있었던 전 매니저분은, 나보다 더 강한 계획, 통제 성향을 가지신 분이었다. 우리 회사에 오셨을 때 본인이 생각했던 회사 상황과는 달라 많이 충격을 받으셨다. 그래서 본인의 생각과 계획대로 팀을 바꾸려고 많이 노력을 하셨다. 그러나 짧은 시간 달라지기에는, 이미 쌓아온 팀의 역사와 문화가 있었다. 팀뿐만이 아니라 윗사람의 철학까지 바꾸려고 노력을 하셨으나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에게 필요했던 것은, 여기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내 생각과 철학대로 조직을 통제하려고 하니 오히려 반발이 더 심해졌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힘. 그것이 이 회사에서 아니, 모든 조직에서 요구되는 현대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수잔 애쉬포드의 '유연함의 힘'이라는 책에서는,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소프트 스킬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커뮤니케이션, 팀워크, 문제 해결력, 공감 능력 등이다. 

이번에 헬스장에서 겪은 작은 에피소드로 인해 다시 유연함의 힘이 얼마나 인생에 필요한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유연성을 가지려면 우선 내가 완벽하지 않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가정부터 시작해야 한다. 성공은 여러 번의 실패의 경험, 당황의 경험을 거쳐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런 경험에서부터 '아, 이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의 유연함이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잘 계획해 놓았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코로나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나와 상관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외부 환경으로부터는 유연함을 가지고, 내부적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으로 나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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