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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Aug 15. 2024

시대를 역행하는 아날로그 취향

나는 아날로그 인간이다

오랜만에 내 마음에 쏙 드는 취향 저격 공간을 발견했다.

지난 주말 남편이 폭풍검색으로 찾아낸,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과연, 주변 대학생들이 다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의 풋풋한 얼굴과 힙한 패션을 보니 잠시 부럽기도 하고 동시에 주눅이 들기도 한다. 동네에 있는 곳이라 가볍게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왔는데 살짝 부끄러워진다. 

카페 이름이 무슨 데시벨인가였는데, 엄청나게 큰 스피커로 시종일관 트렌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쿵쿵대는 비트에 내 심장도 콩콩 뛰는 것 같다.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바로, 세련된 까망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까망 연필과 하양 메모지, 투명 자 때문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특히나 카페에서 발견하기 힘든 물건이 세트로 모여 있다. 태블릿 같은 전자기기가 있을법한 세련된 공간인데, 반전 매력이다. 아크릴 꽂이에 내가 좋아하는 문구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괜스레 마음이 설레어 빨리 사용해보고 싶어 진다. 

하양 메모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까망 연필을 손에 잡아본다. 매번 볼펜만 쓰다가 오랜만에 연필을 만나니 학창 시절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흑심을 품고 있는 흑색의 연필을 손에 쥐고 오늘의 날짜를 적는다. 왠지 무언가 기록해야 할 것 같다. 마침 좋아하는 후배가 사준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이 가방에 있다. 책의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마음에 남는 문구를 찾아본다. 그리고 순백색의 메모지에 연필로 사각사각 글씨를 쓰며 옮겨 본다. 무언가를 더 많이 더 빠르게 담고 싶어 책장을 계속 넘긴다. 책의 내용에도, 손글씨에도 곧 푹 빠져, 공간을 꽉 채우던 쿵쿵거리는 음악이 페이드 아웃된다.


내 취향은 한결같이 찐 아날로그이다.

언젠가 남편이 생일선물로 사줬던 전자책 단말기는, 호기심에 딱 한번 사용한 이후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 종이책을 내 손에 쥐었을 때의 첫 설렘과,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길 때의 사라락한 감촉,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에 색깔펜으로 줄을 치는 행위는 언제나 나를 달뜨게 한다. AI를 더듬더듬 사용하고 있지만, AI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어쩐지 거부감이 든다. 아웃룩 일정을 보는 것보다, 다이어리에 손글씨로 적혀 있는 오늘의 해야 할 일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회의록도 매번 다이어리에 색색의 볼펜으로 적는다. 글씨를 쓰는 행위 위 자체가 그냥 좋다.

좋아하는 웹툰이나 OTT를 보고 나면 허무함이 남는데, 초록의 공원을 걷고 나면 상쾌함이 나를 감싼다. 

직장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는, 직접 얼굴 보고 하는 것이 더 인간다운 것 같다. 누군가의 손 편지는 감동 그 자체이고, 귀찮기는 하지만 직접 재료를 사서 손수 만들어 대접하는 식사를 좋아한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 책상 위에는 탁상 달력과 예쁜 디자인의 타이머가 놓여 있다. 전자기기가 주지 못하는 감성이 아날로그에는 잔뜩 존재한다.


17년간 이어가고 있는 내 밥벌이는 마케팅이다.

트렌드에 가장 민감해야 할 직종이기도 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은 옛 말이 된 지 오래다.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릴 정도로 세상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디지털이 마케팅의 주요 채널이 되었고, AI는 마케팅마저 자동화, 효율화시키고 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움직이던 우리 회사의 마케팅에도 디지털 바람이 불고 있다. 디지털을 모르면, 이해하지 못하면, 마케팅을 지속하기 힘들다. 광고 업계 레전드였던 최인아 작가님도 디지털의 시대에, 자신보다 더 디지털을 잘 다룰 수 있는 후배에게 기회를 물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할 정도이다. 나도 매번 비슷한 생각을 한다. 아날로그 인간으로 살아가는 내가 과연 디지털을 이용해 내 직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도 디지털 마케팅은 팀원들이 전문적으로 잘 해내고 있고 내 역할은 그들을 그저 옆에서 응원해 주는 것일 뿐. 시대에 뒤처지는 아날로그 취향은 나의 밥벌이까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AI가 내 직업을 위협하는 시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한다.

디지털을 따라가기가 버거운데 이걸로 업을 이어가야 한다니 과연 가능할까 벌써부터 자신이 없어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알게 모르게 디지털을 여러 모로 접하며 살고 있다. 스마트폰, 로봇청소기, 마이크로소프트, 챗지피티 등 수많은 것들이 내 주변에 이미 삶의 모습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니 겁먹을 것 없다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본다. 


식당에서 삼성페이로 결제를 하려는데 갑자기 먹통이 되었다. 상점이라면 물건을 다시 내려놓고 오면 되겠지만, 이미 먹어버린 밥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회사 명함을 맡기고 온 적이 있다. 내 차는 스마트폰으로 열리는데, 폰 배터리가 떨어졌던 어느 날은 차를 버리고 집에 돌아올 뻔했다. 디지털은 편리함을 선물했지만 여기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부정하고 걱정하던 아날로그 취향도 디지털 시대에 하나의 '특수함'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의 편리함은 잘 활용하되, 나의 인간적인 아날로그 감성은 고유함으로 남겨 놓으면 되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내면 관찰과 종이에 쓰는 손글씨를 나만의 컨텐츠로 발전시키면 되겠다는 건설적인 상상도 해본다. 

뭐가 되었건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영역이니 말이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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