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단한 듣기 연습이 필요하다
얼마 전 고객사의 높은 분(?)들이 우리 회사 교육 센터에 방문한다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부사장, 상무 등의 고객사 임원진들이 직접 찾아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B2B(Business to Business) - 기업과 기업 사이의 거래를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부서에 속해 있다. 하나의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한 곳의 고객사에서도 구매, 생산, 연구, 물류 등 다양한 부서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대부분 사전에 약속을 하고 실무진을 만나는 정도였다. 이번처럼 임원들을 만나는 건 극히 드물다. 게다가 우리가 그쪽 회사로 가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우리 회사로 오다니, 이건 1-2년 안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그들이 만드는 제품의 원료물질과 생산장비를 공급하는 우리 회사는, 어찌 보면 그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을'의 입장이다. 다른 경쟁사들을 다 제치고 우리 회사 제품을 써달라고 요청하며 끊임없이 영업을 하는 입장 말이다.
을인 우리들은, 갑의 행차를 완벽하게 준비하기 위해 작전 회의를 했다.
고객사의 임원진들이 어떤 사유에서 방문을 하고 우리 회사의 어떤 제품에 관심을 보일지,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알아냈다. 고객사 홈페이지뿐 아니라 임원진들의 개인 경력을 알아내기 위해 링크드인 사이트에도 들어가 정보를 파악했다. 교육 센터에 전시되어 있는 회사 제품을 보다 잘 보여주기 위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재배치하느냐 부산했다. 최첨단 제품을 판매하다 보니, 그 기술을 잘 설명하기 위한 전문가들의 참석과 준비도 필수였다.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섭외하고 각자의 역할을 부여하고, 투어 동선 확인과 리허설까지 마치니 벌서 방문 당일이 되었다.
하나둘씩 오시는 고객사 분들을 여러 명의 직원들이 극진하게 맞이했다.
자리를 안내해 드리고 음료를 대접한 후, 자연스레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드렸다. 보통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스몰토크가 시작되고, 우리 직원들은 고객에게 안부인사를 가장한 질문들을 건넨다.
"올해 언론에 발표하신 A 프로젝트의 타임라인 때문에 많이 바쁘시겠어요."
"요즘 B 분야에 대한 연구도 하신다고 들었는데, 좀 어떠세요?"
하지만 이번 고객분들은 철벽형이다.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예의상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아, 그렇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등의 단답형 대답을 했다. 대부분 과학자, 연구원 출신들이라 내향형이며, 이런 종류의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유추하게 된다. 원래 소소한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숨겨진 정보들이 많은데, 이번에는 잘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짧은 회사 소개를 마치고 그분들이 가장 관심 있어할 만한 제품 소개로 바로 넘어갔다.
회사 교육 센터는 여러 방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방마다 주력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각 방마다 전시된 제품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나서서, 투어를 시작한 고객분들께 각종 배경 지식 및 제품에 대한 원리를 설명드렸다. 어찌나 잘 준비했는지 청산유수로 줄줄줄 막힘없이 소개한다. 열심히 옆에서 같이 들으며 사진도 좀 찍다 보니 흐뭇한 마음이 든다. 아유, 참 잘하네.
그러다가 5분 정도 넘어간 순간, 약간의 이상함이 감지되었다. 고객분들께서 설명을 듣고도 아무런 질문을 안 하는 것이다. 보통 관심이 있다면 궁금해서라도 제품에 대해 한 두 가지라도 물어볼 텐데 그냥 서서 듣고만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건 좀 아닌데라고 반발하는 그 어떤 '리액션'도 없었다.
그러나 설명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미처 고객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준비한 설명이 아직 한참 남았고, 이미 동선도 다 짜놨기에 어떻게든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하려는 것 같다. 그들의 설명을 듣다 보니 나의 십 년 전 모습과 겹쳐 보였다. 첫 직장에 마케팅 직무로 들어가 신입사원으로 이것저것 배우던 중, 갑자기 영업사원이 그만두었는데 메꿀 사람이 없다며 두 달간 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사실 신입사원이라 선택권은 없었다. 다행히도 나와 같이 입사한 친한 선배가 함께해 든든했지만, 둘 다 영업 경험이 없어 참 많이 헤맸다. 몇 달 안 된 경력이었지만 잘하는 분야는 고객 앞에서 진행하는 학술 세미나나 제품에 대한 설명 등이었다. 이 강점을 가지고 고객이 있는 곳의 문을 노크한 다음, 둘 다 엄청나게 제품에 대한 장점을 설명했다. 하루에 만나는 고객 수는 10명 남짓이었고, 한 고객사당 10-20분간 만나면 진이 빠지곤 했다. 이렇게 며칠 지속하다가 선배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른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둘 다 영업에는 영~~~ 소질이 없는 것 같다."
체험판으로 영업을 경험해 보고 깨달은 것은, 영업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리 제품을 빠삭하게 잘 알고, 장점을 잘 설명한다 한들 고객들은 듣지 않았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많이 설명하는 게 좋은 줄 알고, 고객에게 질문 1-2개 던진 다음 그들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제품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온 적도 있었다. 고객보다 내가 훨씬 말이 많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이 참 착하게 잘 들어줬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말을 조금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가장 많이 고민했던 때이다.
그러나 고객은 영업사원의 말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가 맡았던 두 달간은 영업실적이 최하위였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 얘기, 제품 얘기, 우리 회사 얘기만 하다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고객사 임원진의 회사 방문 시점으로 넘어와보자.
이때 제품 설명보다 어찌 보면 더 필요했던 것은, 고객의 니즈 파악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우리 제품과 기술 너무 좋아요'에 대한 설명이 아닌 것이다. 고객이 왜 이 시점에 우리 회사를 방문했고, 무엇을 보러 왔는지 다시 파악해야 했다. 그들이 온 이유가 특정 제품이나 기술에 대한 관심이라면, 잠깐 설명을 멈추고 그들의 관심사를 질문을 통해 알아봐야 한다. 내향적인 고객들의 특징 때문에 바로 답을 주지는 않을 테니, 그 답을 유도하기 위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답하는 순간, 이 답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하며 잘 들어야 한다. 보통 고객들은 Yes or No의 쉬운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A라는 모호한 답을 한 경우, 왜 그렇게 답했는지 생각해 보고 혹시 A가 아닌 B가 원하는 바인지 다시 물어볼 수 있다.
나는 영업에 대해 잘 모른다.
영업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고, 경력이 한참 된 지금 해보라고 해도 잘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영업에 문외한인 나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업은 쌍방향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업사원의 전달력도 물론 중요한 요소겠지만, 고객의 말을 잘 귀담아듣고 그들의 비언어적인 표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말하기보다 듣기 먼저!' 가 이날의 고객사 방문에서 느낀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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