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고 싶지만 꼭 해야 하는 결정
세상에 좋은 결정인지 아닌지, 미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어떤 결정을 했으면 그게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노력하는 일뿐이야.
- 공지영 작가, 즐거운 나의 집 -
결정의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찾아온다.
그리고 결정이 주는 압박감은 때때로 우리를 짓누르기도 한다. 아침 메뉴로 토스트를 먹을지 시리얼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쯤이야 눈감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A or B 선택이 아닌, 복잡한 상황에서의 선택이나 여러 개의 답안지가 있는 경우 결정은 조금씩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돌아오는 아빠의 칠순 생신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되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가족들과 조촐히 모여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다 같이 여행을 떠날 수도 있으며, 기념사진을 찍으러 갈 수도 있다. 식사만 하는 경우라도 옵션은 다양하다. 아빠가 좋아하시는 해산물 요리를 먹으러 동해바다에 가는 것, 서울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모시는 것, 룸이 있는 식당을 대관해서 파티까지 같이 하는 것 등등 식사라는 것만으로도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가 잘못될까 봐 걱정되어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하고, 고민하고, 걱정한다. 동해까지 가서 해산물 요리를 먹었는데 맛이 없으면 어떡하나, 누군가 일정이 안돼서 동해에 못 간다고 하면 어떡하나, 혹은 해산물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면 어떡하나 따위의 걱정이다. 내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는 불평을 터뜨리고, 누군가는 피해를 볼까 봐 염려된다.
개인적인 선택도 이렇게 복잡한데,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에서의 결정은 오죽 까다로울까.
회사원으로서 내려야 할 크고 작은 결정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를 압박한다. 밀려 들어오는 업무가 많은데 어떤 일부터 먼저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고, 경쟁사 제품을 사려는 고객을 우리 제품으로 돌리려면 어떤 제안을 할지 결정해야 하며, 오늘 회의에서 우리 부서의 입장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렇다. 누가 말했듯, 인생은 그야말로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있는 것 같아 부담이 된다. 종종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은 이 압박감을 더 크고 심하게 느끼기도 한다. 내가 지금 내리는 결정이 나에게, 우리 팀에게, 우리 회사에게, 나아가 회사와 관련된 고객이나 관계사들에게 피해를 주는 잘못된 선택일까 봐 무섭다. 꼼꼼하게 검토해 보더라도 C 선택지는 이런 면에서 걱정되고, D 선택지는 다른 면에서 고민된다. 그래서 가끔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고 보류하는 경우도 있다. 완벽한 선택을 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선택을 안 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 부서는 비즈니스의 복잡성과 수많은 이해 당사자들로 악명이 높다.
고객사에서 요청한 주요 사항 하나를 결정하려고 해도, 여러 팀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문제점을 쏟아낸다. E는 이래서 안 되고, F는 이게 문제고, G는 고려해 볼 법 하지만 글로벌에서 반대할 것이라 말한다. Risk management 차원에서 여러 요소들을 따져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결국 문제점만 늘어놓다가 아무 결론 없이 회의가 그냥 끝나기도 한다. 어떨 때는 우리의 답변과 결정이 느려 고객사가 기다리다 못해 경쟁사를 선택한 적도 많다.
새로운 리더가 우리 부서로 부임한 지 한 달이 되었다.
리더의 변화는 언제나 그렇듯 새 바람을 몰고 온다. 그중 가장 긍정적인 변화라 느꼈던 점은 바로 '결정'을 미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비즈니스 환경 때문에 팀별로 싸우다가 끝났던 회의는, 리더의 개입으로 많이 바뀌었다. H 팀에서 안된다고 반대한 의견에 대해 리더는 질문을 했다. 왜 안 되는 건지, 누구의 생각인지, 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만약 이 결정을 했을 때 그려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무엇인지. 비슷한 유형의 질문을 I, J, K 팀이 발언하는 시간에도 똑같이 하면서, 각 팀의 대표들은 변화해 나갔다. H가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쩔쩔매는 것을 보면서, 자신만의 논리적인 답변을 가다듬기도 했고 안 되는 이유보다 되는 방법을 어떻게 찾을지 더 고민하기 시작했다.
각자 의견을 내놓으면 리더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결론이 OO 맞나요?"라고 되물었다. 당황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다가도, 결론만 얘기하시라는 지적을 받으면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생각한 최종 결론을 내놓았다.
회사 내에서 결정의 속도가 빨라지니, 일의 추진력이 붙기 시작했다.
방향성이 좀 더 명확해졌고, 다 같이 그 일을 되게끔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결정을 못 내리고 심지어 회피했던 우리 부서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사실 우리 부서 사람들이 책임감이 아주 높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난처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결정을 좀체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결정은 매 순간 필요한 일이다. 계속 미룬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더 고민하면 더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때로는 환상이다.
가장 잘못된 결정은,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이 복잡하고 험난한 사회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내린 잘못된 선택은, 조금씩 경로를 수정해 가면서 바로잡아가면 된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결정을 위한 작은 시도와 연습인 것이다.
머리가 너무 아파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면, 질문지를 만들어 보자. 우리 부서의 리더가 그랬듯 나에게도 남에게도 질문을 건네면 결정의 방향성이 조금씩 보일 것이다. 질문과 답을 통한 결정하는 연습은 조금씩 쌓여 나의 재산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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