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기준은 진정성인듯
극성인 무더위에 다들 여름휴가를 떠나고, 도시가 텅텅 비었던 8월 초의 일이다.
토요일 아침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한의원에서 연락이 왔다. 원장님의 휴가로, 보통 평일에만 출근하는 다른 공동 원장님이 진료를 볼 예정이라는 안내 문자였다. 하필이면 여름 감기 기운이 최고조에 이를 때였다.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어 연차를 내고 집에서 끙끙 앓다가, 토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한의원에 방문했다. 처음 본 원장님은 본격적인 진료 전 차트를 보며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오늘 손 증상은 좀 어떠세요?"
면역력이 떨어져 시작된 발의 한포진 증상 때문에 4개월째 한의원을 다니는 중이었다. 감기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 잘 안 들리기도 했고,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재차 물어보는 원장님의 말에 "네? 손이요?"라고 반문하니,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신 듯했다. 손이 아니라 발이라고 정정하고는 오늘 진행할 발 치료 방법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러나 나는 인내심이 바닥이었다. 듣다가 말을 끊어 버리고, 감기가 너무 심하니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제발 감기 증상만 낫게 해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파도 할 건 해야 했다.
한의원 진료가 끝나면, 3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들러 한 주 동안 필요한 먹거리와 생필품을 사는 것이 주말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이 깨질듯한 머리와, 몽롱한 정신으로 마트에 갈 수 없었다. 아픈 와중에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딱 한 잔만 마시면 몸도 깨어나고 머리도 맑아질 것 같았다.
발걸음을 돌려 바로 앞 에스프레소 바에 갔다. 이전 글에도 소개했던 나의 글감, 영감 장소. 매번 나비넥타이에 정장을 입은 바리스타님이 근사한 커피를 만들어주시는 곳이다. 커피맛을 모르는 나조차도 여기 커피는 정말 맛있다는 생각과 함께, 잠시나마 여기가 이탈리아인가 싶은 착각이 든다. 10분 남짓 머무르는 시간 동안 카페인이 혈관을 타고 들어와 뇌를 깨우면, 글감이 퐁퐁 샘솟는 느낌도 든다. 예술가들이 왜 카페에 가는지 알 것 같은 착각? 어쨌든 기대를 안고 문을 여는데 평소 못 보던 다른 바리스타님이 서 있었다. 아마도 휴가를 가셨겠거니 짐작하다가, 다시 그분을 보고 흠칫 놀랐다. 나비넥타이까지는 아니라도 파타고니아 티셔츠를 입고 계실 줄은 몰라서...
바리스타님의 의상과 커피맛은 상관관계가 없겠지만, 이 시점부터 조금 실망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진 커피 추천도 평소만 못했다. 지난번과 같은 커피를 시켰는데, 미묘하게 다른 커피 맛이 느껴졌다. 아니지, 다르다 생각한 한 건 맛이 아니라 분위기였나?
무엇이 달랐을까.
당연히 사람이 달랐다. 그러나 한의원 원장님도, 바리스타님도 모두 다 전문가였다. 실력 차이가 과연 있었을까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다이다. 한의원은 공동 원장님이었고, 평일에는 다른 분들의 진료를 책임지는 전문가였을 것이다. 바리스타님도 똑같이 자격증을 따고 경험을 오랫동안 쌓은 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두 분 다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럼 뭐가 다른 걸까?
우선 한의원의 경우, 주치의 원장님은 내 통증 부위를 세심하게 봐주시고 진행상황에 대해 매번 확인 및 조언, 그리고 대안의 치료 방안을 제시했다. 맥주 한 잔이라도 마시면 큰일 난다고 잔소리를 하실 때도 있었지만, 그건 애정 어린 충고였다. 지난번에는 오른쪽 두 번째 발가락에 증상이 심했는데 이번에는 괜찮아졌다며 나보다 더 기뻐하신 적도 있다.
에스프레소 바의 바리스타님은, 복장이 멋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기억력이 탁월했다. 사실 기억력이라기보다는 관심법이었던 것 같다. 손님 한 명 한 명의 커피 취향을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있다가, 맞춤으로 커피를 추천하는 식이었다. 단 걸 별로 즐기지 않는 나를 위해서 3-4가지의 선택지를 주시면서, 다음에는 이걸 마시면 커피를 더 즐기실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 주셨다.
차별화된 전문가가 되려면, 고객(상대방)을 향한 관심과 진정성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물론 전문가는 기본적으로 지식, 실력,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실력을 연마해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자신의 자리매김을 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에 한 스푼의 양념을 더 얹어 훨씬 맛깔나진다면, 그것이 바로 고객 맞춤 서비스 아닐까 싶다. 만약 내가 IT 전문가인데 다른 동료와 실력이 고만고만 비슷하다면, 고객이나 회사의 니즈를 더 빨리 파악해 여기에 맞는 해결책을 내놓는 사람들이 더 인정받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 새로 만난 한의원 공동 원장님은 실력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나에 대해 잘 모르셨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 실수를 했고, 고객인 나의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 온 바리스타님은 고객의 취향을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번의 질문만 나에게 건넸더라도 충분히 나의 니즈를 파악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 안타깝다. 티셔츠를 입지 않고 커피바에 어울리는 다른 복장을 선택했더라면, 커피를 대할 때, 자신의 일을 대할 때 얼마나 진지하고 진정성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것 같다.
진정성과 관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다시 질문을 가져와본다. 나는 내 일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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