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 돌보기로 찾은 자기 효능감
연말이었던 지난주는 남은 연차 소진 기간이었다.
늘 연말마다 휴가를 내고 가족들과 긴 여행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오랜만에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만의 휴가에는 과연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그동안 서로 '먹고살기 바쁘다는, 육아 때문에 바쁘다는, 물리적인 거리가 멀다'는 등등의 이유로 만나지 못했던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첫날은 나의 대학교 절친과의 만남.
대학교 때부터 서로 인생의 가치관과 방향성, 성격 등이 잘 맞아 속 깊은 대화를 많이 하며 친해진 친구이다.
휴가로 한가한 나는 일부러 6살 아이의 독박육아를 하는 친구를 배려해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찾아갔다.
사실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데다, 그녀의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사이라 인사를 하는 아이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방에서 칩거하는 사춘기 딸만 보다가, 장난기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의 6살 꼬마 아이를 보니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럽던지!
나는 미리 준비한 장난감을 가지고, 친구가 손님맞이 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와 둘이 자동차 놀이와 공룡 놀이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내가 공룡을 자동차 위에 올려놓고 과장된 몸짓으로 연기를 하며 공룡이 떨어진다고 살려달라고 소리치니, 아이는 귀엽게도 공룡을 구해야 된다고 울먹인다.
계속된 놀이에는 아이의 창의성이 더해져 주차타워를 공룡 집으로 만들기도 하고, 헬리콥터와 익룡을 하늘에서 대결시키기도 했다.
아, 얼마만의 아이와의 놀이인지.
다행히 아이는 나와의 놀이가 신났던 듯 깔깔대는 웃음이 늘어갔고, 계속 같이 놀자며 이것저것 놀잇감을 권하기 시작했다. 친구도 내가 육아의 시름을 잠깐이라도 덜어주니 엄청 좋아하며 고마워했지만, 아쉽게도 아이가 잠들 시간이 되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 날은 전 직장 친한 동료와의 약속이었는데, 워킹맘인 그녀의 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인생과 육아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했던가.
유치원 방학인데 왜 나만 유치원을 보내려고 하냐고 조목조목 따져 묻는 5살 아이의 논리적인 반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급하게 휴가를 내고 아이를 약속 장소에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꼬마 아이와도 첫 만남이었다. 아이를 낳고 잘 키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그녀의 아이는 똑 부러지고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부리나케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해 밥을 먹으며 열심히 수다를 떨다가, 아이의 반찬을 챙겨주다가, 잠깐 놀아주다가 하다 보니 이미 아이의 인내심은 한계였고 호기심은 최대치로 향했다.
우리는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 급하게 키즈 카페로 장소를 옯겨다.
태어나 처음으로 키즈카페에 온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엄청나게 신기해했다.
아이와 함께 이것저것 체험하며 같이 노는데, 나 역시도 키즈카페가 너무 오랜만이라 설레고 즐거웠다.
아이는 신나게 미끄럼틀을 타고, 짐에 들어가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며, 자석 물고기 낚시를 한다고 바빴다.
그리고 너무 키즈카페가 너무 재미난 나머지, 집에 안 가겠다고 볼풀장에서 엎드려 엄마가 자기를 못 찾게 만들기도 했다.
식구들의 저녁밥을 만들어야 할 시간이 다가온 나는, 이번에도 친구와 아이를 놔두고 아쉬운 발걸음을 집으로 향해야 했다.
친구의 아이들과 실컷 놀았던 이틀간의 나를 돌아보니, 신기한 감정이 들었다.
우선, 뿌듯함.
아이들은 내가 시답잖은 농담을 던져도 살짝 옆구리를 간지럽히기만 해도 아주 재밌다며 웃어줬다.
예를 들어, '이모의 별명은 다음 중 무엇일까요? 1번 오이, 2번 당근, 3번 호박' 하고 퀴즈를 내면 열심히 답을 맞혔고, 내가 땡! 하며 '1번이 정답입니다'라고 말하기만 해도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깔깔댔다.
여기에 더해 공룡 이름을 방귀와 똥으로 짓기라도 하면, 자지러지며 배꼽을 잡고 쓰러졌다.
나는 이번에 내가 느낀 뿌듯함의 근원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다 발견한 하나는, 내가 우리 집에서 재미없는 사람으로 낙인 되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하도 웃기고 장난기도 많은 사람이라,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둘이 놀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개그맨 뺨치게 아이와 놀아주니, 아이는 점점 더 아빠와의 놀이를 즐겼고 내가 끼어들어 무슨 말만 하면 '엄마는 노잼'이라는 반응을 해 상처받은 적도 있었다.
나는 이런 부녀를 보며 잘 노는 모습에 흐뭇한 한편, 부러운 감정과 얄밉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런 상태로 몇 년간 지내며 나는 아이와 잘 못 노는 진지한 엄마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5-6살 꼬마 아이들과 놀며 아이들이 재밌다며 이모 집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들으니 한편으로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나 보다.
그리고 집에서 내가 진지하다며 또 놀리는 남편에게 어이없이 이렇게 대꾸했다.
"나 재미없는 사람 아니거든! 애들한테 인기 짱 많아!"
이런 나의 감정을 심지어 아이한테까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욕구 중독일까 생각하다가,
자기 효능감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재정의해본다.
나는 결혼 전부터 아이를 너무 좋아했고, 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꾸 내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피하고 안 해왔던 거다.
그리고 자기 효능감의 프레임으로 나를 다시 바라보니, 이번에 아이들과 신나게 놀며(놀아준 게 아니라 같이 논거다) 자기 효능감이 높아져 다시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렇게 나는 또 나를 발견한다.
이제 중학생이 되는 아이와 당분간 놀기는 글렀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아이들과 놀며 잊어버린 나의 마음과 동심 모두를 찾아보고 싶어 진다.
#글루틴 #팀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