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파랑새 증후군
지난번 참석했던 전시회에서 오랜만에 첫 직장 동료를 만났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면, 이렇게 전시회나 컨퍼런스에서 우연히 만나곤 한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으로,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물어봤다.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우던 중, 그가 나에게 말했다.
"얼굴 좋아 보인다. 예전부터 가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회사에서 일해서 그런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불과 몇 달 전, 그만두겠다 하고 사표까지 냈었는데... 그전에도 퇴사와 부서 이동을 반복하며 줄곧 이 일을 놓고 싶어 안달이었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이 회사를 그렇게 가고 싶어 했었다고?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기억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그의 한 마디에, 나는 이 회사 입사 전 기억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직원 100명 남짓의 국내 대리점에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졸업도 못할 뻔한 대학원을 탈출해 사회로 나오니, 너무 좋았다. 처음 해보는 업무였지만, 적성에 맞지도 않는 연구보다는 훨씬 재밌었다. 동기들과 회식이며 야근을 하며 보내는 시간도 즐거웠고, 가끔씩 토요일에 갔던 단체 등산마저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계기는 한국 지사 법인 직원들과 소통이다. 당시 우리 회사에서는 해외 바이오 브랜드를 한국에 수입 유통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매출 규모가 커지면서 몇 브랜드에서는 한국에 직접 지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다만 1-2명의 소규모 지사였던 터라, 여전히 유통망은 우리 회사를 이용했다. 그러면서 우리 회사 직원들을 가끔씩 '을'처럼 대했다. 매출 실적 보고를 해라, 어떻게 다음 분기 목표를 채울 것이냐 등등을 추궁하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많은 브랜드에서 한국에 지사를 만들었다.
당시 나는 그들에게 양가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갑의 역할을 하는 것 같데, 별로 능력은 없어 보였다. 한국 시장에 대해 잘 모르면서 감내놔라 배내놔라 명령만 하는 듯 보였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 훨씬 똑똑하고 판매나 마케팅도 더 전문가라 생각했다.
반면, 나도 저기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첫 직장에서 5년을 일하고 나니, 성장에 대한 갈망도 커졌을 때였다. 이직을 한다면 반드시 해외 브랜드의 한국 지사에 가리라 희망하고 마음을 먹었다. 대리점과 다른 그들의 업무 방식이 궁금하기도 했고, 영어를 많이 쓰는 모습이 괜스레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던가, 어느새 내 꿈은 당시 내가 맡았던 브랜드의 한국 지사 담당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정말 그 바람대로 이직에 성공했다.
회사 규모는 더 작았지만, 외국계 회사에 입사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동기부여였다. 글로벌 브랜드, 영어 회의, 제품 메인 담당자 등. 이전 회사에서 충족되지 않는 요소들이, 여기에는 있었다.
그러나 막상 입사를 하고 보니, 나의 상상은 환상에 불과했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체계 없는 회사 시스템, 대리점에 대한 높은 정보 의존도, 문제 발생 시 대처 미흡 등등. 내가 꿈꾸던 것은 분명 거기 있었지만, 그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던 빙하 같은 단점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속으로 이건 아닐 거야 생각하며, 나는 어디엔가 있을지 모르는 '꿈꾸던 자리'를 계속 찾아 헤맸다. 아시아 담당자 자리 더 좋아 보여 지원하기도 했고, 퇴사를 했다가 다른 부서에 재입사하기도 했다.
지금 나는, 한때 그렇게도 간절히 입사를 원했던 회사에서 11년째 일하고 있다.
이 일이 내가 꿈꿔왔던 일이라는 것을, 새카맣게 잊은 채 말이다. 그리고 많은 직장인들이 나와 비슷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그만둘 궁리만 하고 있는 마음. 내가 왜 이 일을 그토록 원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마음 말이다. 실례로 내 절친은, 대학을 졸업하고 힘들게 공부해 의학전문원에 들어갔다. 늘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 말하던 친구였다. 종합 병원에서 레지던트까지 마치고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 친구는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나는 투자가 너무 재밌어. 돈만 안정적으로 벌 수 있다면, 의사 그만두고 투자하려고."
의술로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고 스스로 택한 이 길이, 자신이 원하던 길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그때의 나는 친구를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나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되짚어보니, 그동안 꿈을 '명사'로 정의해서 그런 것 같다.
그 명사는 대부분 직업이었다. 의사, 디자이너, 체조선수 등등처럼 이름 붙일 수 있는. 하지만 그 자리에 도달하고 나면, 그제야 알게 된다. 우리의 꿈은 한 지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게 계속 진화하는 동사형이라는 것을. 간절히 바라던 그 일도, 결국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변화하는 삶의 한 조각이다.
한 편으로 드는 생각은, 지금의 일이 정말 싫더라도, 내가 이 일을 처음 원했던 초심을 떠올리는 것은 꼭 필요한 것 같다. 지금 이 일이 내 마지막 목적지는 아닐지라도, 그때의 나에겐 분명 도착지였으니까. 간절히 원했던 그 마음은,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끈 '진짜 동력'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다음 여정을 향해 가는 내 안의 불씨일 수도 있다.
지금 하는 이 일이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어도 괜찮다. 하지만, 이 일은 분명 ‘내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 기억 하나만으로, 나는 오늘 하루를 견디며, 내가 원하는 인생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