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백년의 신화, 그리고 어린 나와의 작별

by 이은주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의 날. 가난한 인형의 집 언니와 나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를 관람하기 위해 외출을 한다. 한낮의 덕수궁. 나는 오전 9시부터 1시까지 요양센터 봉사에서 전직 디자이너였으며 어떤 쇼크로 기억을 상실한 58세의 부인이 한달 동안 보여준 인지발달에 고무되어 있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는 것조차 잊어버린 그녀가, 멀미가 날 정도로 서성이며 배회를 했던 그녀가 놀이시간에 색종이에 그린 나비를 가위로 오리거나 들여다보면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놀이에 참여했던 것이다. 아이가 처음 엄.마. 하고 입을 뗀 것처럼 반갑고 고마운 체험.

문화의 날은 대단했다. 성장을 한 사오십 대 여성들이 줄지어선 그곳은 평소에는 자신의 나이를 잊고 살던 내가, 조금은 젊은 기분으로 살던 내가 거울 앞에 선 기분, 애써 거울을 피하고 싶던 자신을 거울 앞에 세운 기분이랄까. 미술관에 평소에 입던 옷이 아닌 옷을 차려입은 그녀들은 약간은 들떠보였으며 살짝 나이들어 보였다. 문화를 소비하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긴 줄을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다.

그림 앞에서 좀처럼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기다리는 시간들. 사람들 너머로 기웃거린다.

1956년. 나무와 노란새.

아플 때 그린거네... 그림 앞에 선 언니. 마치 동양화 같이 무채색에 가까운 채색이 아파보인다. 종이에 크레파스.

1955년. 노란 태양과 가족. 종이에 혼합재료. 그림을 지나치며 인형의 집 언니는 혼잣말인듯 중얼거린다. '물감을 무지 아껴써.'

'언니, 그 말은 우리가 식용유를 아껴 쓰는 것과 같잖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허공에 던져진 언니의 말이 아프다. 나는 인형의집 언니가 인형을 만들 때 아낌없이 색을 썼던가 돌이켜본다. 그녀의 팔레트는 쿠킹 호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홍대 작업실의 껑충 뛴 집세를 더이상 감당할 수 없어서 짐을 싸야했던 그녀. 나는 쿠킹 호일에 짜서 쓰던 그녀의 물감을 그후 보지 못했다. 다만 왜 좀더 언니의 인형들을 사두지 못했을까 속이 상할뿐.

이중섭 백년의 신화에는 일본 유학 당시 아내에게 보낸 엽서들이 공개되어 있었다. 그들 바다를 건넌 사랑이 부침이 심했을 서막이기도 한 흔적들, 그후 가족의 연을 맺고 족두리를 쓰고 전통혼례를 올린 마사코는 남덕이 되고 그들은 그렇게 부모가 되었으며 마침내 서로의 땅에서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다. 그가 보낸 수많은 편지들, 편지 속 그림들을 보며 인형의집 언니가 종이가 얇네라고 한다.

옛날에 국제우편은 무게로 우표값을 치뤄서 그래요. 저도 일본에 있을 적에 이렇게 얇은 종이에 깨알같이 적어서 보냈거든요. 인형의집 언니는 아, 한다. 그런 언니 곁에서 나는 한마디 더 한다.

이런 사랑, 이런 애착 좀 무섭지 않아요?

왜? 난 받아 보고 싶은데. 넌 이런 사랑 못 받아봤지?

우리 엄마, 우리 엄마가 이런 사랑받았잖아요? 아빠한테서. 베트남 전쟁 때 이렇게 얇은 종이에 깨알같이 글써서 그림도 그려 보낸 편지가 아직도 남아있어요. 그런데 그 사랑이 결혼 10년차에 또 다른 사랑이 생겨서 이혼했잖아요. 난 그때부터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구요.

덕수궁 석조전 계단을 내려오면서 벽 한 면을 장식한 이중섭의 흑백사진을 찍을 때 인물을 세우지 않아 사진이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구멍난 화가의 낡은 신발에 서글퍼하고 담배 쥔 손에 아파하면서 언니는 지나가듯 말한다. 이중섭 연극 소도구를 담당한 적이 있어. 그때 이중섭 자료를 많이 찾아봤거든. 전시회에서 그림이 팔리면 이중섭이 자기 그림 산 사람을 쫓아가서 '내가 꼭 다음에 더 좋은 그림을 그려서 바꿔드리겠다고.' 내가 알거든 그림 그리는 애들 절대 이런 말 안해. 난 사실 이중섭 그림 보다 그의 인품이 더 좋드라. 오래 살았다면 엄청난 예술가의 삶을 살았겠지.

옛날 같으면 그 사실이 너무 속상하고 가슴 아팠겠지만, 인형의집 언니와 같이 재능은 있으나 무명인 시인, 소설가, 화가, 연기자가 많다는 걸 알기에 그만 아쉬워하기로 한 나.


인형의집 언니와 나는 덕수궁 돌감길을 따라 올라가 수업을 마치고 거리로 쏟아진 예원 학생들과 섞여서 미술관에서의 줄만큼 기다린 다음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차례가 오길 기다리면서 중년의 내 또래와 서있을 때보다 학생들과 서있을 때 오히려 마음 편한 자신을 느낀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언니와 나는 다시 돌담길을 따라 역으로 향한다.

그녀와 걸을 때면 꼭 작곡가 이영훈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 머무르게 된다. '난 아직 모르잖아요. 휘파람. 소녀. 사랑이 지나가면. 그녀의 웃음소리뿐. 광화문연가 .가로수 그늘 아래서면'의 작곡가는 1960년에서 2008년까지 살다 갔다. 향년 49세.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생각한다. 고등학교 첫 여름방학 때.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 때. 나와 동생은 처음으로 아빠에게 보내졌다. 여자 혼자서 아이 둘을 양육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의 나는 그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다. 또한 전문직이든 자신의 가게든 한두 번은 위기를 맞고, 그 위기에서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갱년기가 찾아오면 예전처럼 밤샘도 못하고 몸을 부리지 못하여 미래가 성큼 두려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 해 엄마는 어떤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자신보다 아빠가 우리들을 맡아 키우면 더 잘 키우지 않을까고. 그랬다. 엄마는 갱년기에 경제적 위기로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했던 우리를 시험삼아 여름방학 때 아빠에게 보냈다. 우린 그리워했던 아빠와 현실의 아빠를 하루만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아빠의 공간에 우리가 들어가 설 자리가 없음을 아는 데 일주일의 시간은 필요 없었다. 일주일의 짐을 싸들고 돌아 온 우리는 엄마와 살기 위해 여러 가지 공모를 해야 했다. 아빠를 철천지원수로 만들어야 했고, 없는 것도 만들어서 흉을 봐야했다. 물론 그 내용 속에는 낯선 아줌마를 엄마로 불러야 한다는 배반감이 컸다. 무려 십여 년을 엄마엄마 불렀던 내 엄마를 하루 아침에 빼앗긴 기분이라니. 그 배반감은 엄마에게 돌아와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토록 혼란했던 여름방학 덕분에 난 사랑이라는 감정에 과장이 섞여 있으며 깨알같은 연서에 자기애를 보게 되버렸다. 타인이 아닌 자기를 사랑했던 것이다 아빠는. 그리고 서툰 엄마에게 불만을 품었던 기억. 차라리 우리는 가난하니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취직을 해야하고, 오늘부터 장은 보지 않고 김치와 된장찌개만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었으면 하고 바랬던 어린 나였다. 이런 이야기, 남한테는 쉽게 풀어 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인형의집 언니가 있다.

고독했던 사춘기, 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지금도 나는 아프다. 역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말한다.

그런데 지금은 혹시 내 이야기를 할만 한 어른이 주변에 있었는데 내가 도와달라고 말을 못 한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내가 보지 못 하고, 찾지 않은 게 아닌가. 그래서 전 손자가 천 원 주고 벼룩시장에서 산 폴리장난감 팔이 빠져서 잉잉 거리거나 조립을 못해 장난감을 던져버릴 때 '도와주세요' 라고 가르치죠. '도와주세요' 라고 하면 내가 몇 번이고 팔을 끼워줄 거라고, 그리고 언젠가는 폴리 몸통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폴리 팔을 끼워넣을 수 있을 거라고. 손자를 위해 나는 '도와주세요' 라는 말을 자주 연습시킨다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인형의집 언니를 따라 전철에 흔들려 가며 나는 아이처럼 부지런히 종알댄다. 마침내 언니가 사는 역에 내린 우리는 습관처럼 다시 건너편 홈으로 가서 내 집 방향의 전철이 오길 기다린다.

집으로 돌아오자 이중섭의 흑백사진이 카톡으로 와 있다.

검지손가락으로 자음과 모음을 두드린다.

십 대의 끝에 언니가 곁에 있어주어서 나 이제 그만 어린 나와 작별을 할랍니다.

낮에 전시되었던 방명록 속 글을 보며 언니와 나는 즐거워했다.

남자들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정을 나누는구나.

형의 가족이 부러우면 그렇게 화가 중섭은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며

둥섭아

색동저고리

오늘은

입었고나

-한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코~ 자야 아침이 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