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쿄 3부작

헌책방 아저씨 이야기 12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2

by 이은주


새벽에 메모해 둔 종이에서 나는 소리는 좀 특별한 데가 있어요. 깨어있다는 것. 저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지금 막 깨어났지요. 마침내 헌책방 아저씨와의 마지막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국제전화를 끝으로 아저씨와는 마지막 대화가 될 뻔한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그해 저는 자비로 도쿄도서전에 갑니다. 아저씨를 만나러 나카이 역에서 내릴 수가 있었어요. 아저씨는 많이 야위어 있었고, 역시 말수도 적었지만, 기뻐하셨어요. 아저씨는 저에게 들고 나오신 걸 전해줍니다. 그것은 쌀이었어요. 중학교 졸업 후 가난한 시골에서 도쿄로 취업을 나왔었던 아저씨의 고향에서 나온 쌀. 고향에 있던 동생들이 자신이 먹던 밥 한 공기를 더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그 쌀이었던 거예요. 당신은 이해하실 수 있으세요? 그 쌀의 의미를? 만약 당신이 그런 쌀을 선물로 받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그리고 그 쌀을 어떻게 했을까요?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싣고 돌아왔을까요?

저는 그 쌀이 너무너무 무겁게 여겨졌습니다. 아저씨의 쌀은 그냥 쌀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청춘과 바꾼 무엇이었고, 또 그 쌀은 앞으로 제가 바꿔야 할 그 무엇이었으니까요. 세상에 어쩌자고 아저씨는 그런 쌀을 저에게 주셨을까요? 내가 좋아하던 아저씨는 노인이 된 채 내 앞에 서계셨지요.

우리 고향 쌀이야. 아주 유명하지. 가지고 가.

아저씨는 예전에도 그랬고 그날 밤도 똑같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십니다. 여러 형제들 중에 밥숟가락을 줄이기 위해 도쿄로 취업을 나왔던 중학생.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간다 헌책방 일을 마치면 쇼윈도의 흑백 티브이 앞에서 가요방송을 보며 가수의 꿈을 꾸던 아저씨. 자신의 고향이 무대였던 낚시만화 시리즈를 빌려주시거나 필요도 없는 한국어를 저에게 배우시며 센세이라고 불러주셨던 아저씨.

늘 얻어먹기만 했던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저씨에게 저녁을 사드릴 수 있었던 그날, 아저씨는 아주 조금밖에 드실 수가 없었어요. 숟가락을 드는 손이 얼마나 무거워보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제가 간직하고 있는 헌책방 아저씨에 대한 기억의 전부입니다.

지난 가을 도쿄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라고 시작하는 일기를 썼던 걸 기억합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친구는 말합니다.

있잖아, 너처럼 아저씨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봐.

헌책방은 셔터가 내려져 있고, 그 앞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더라는, 나카이 역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헌책방을 지나쳤다는 내용의 장거리 국제전화를 끝으로 저의 헌책방 아저씨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저는 늘 나이 차이가 나는 우정을 동경해왔어요. 장 그르니에와 까뮈의 우정을. 헤어져있어도 서로의 가슴에 별로 빛나는 만남을. 어떤 관계는 대부분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있어서 영원하지는 않더군요. 눈을 감으면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아저씨는 헌책방 안에서 졸고 계십니다. 제가 가게 문을 두드리지요. 그럼 아저씨는 눈을 비비다가 점점 미소 짓는 거예요. 저는 발밑에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머리를 한번 쓸어올리지요. 아저씨가 의자에서 일어서면 제가 팔을 벌려 포옹을 해드리는 거예요. 아저씨는 말합니다. 아니 말하려고 하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제 어깨에 떨어진 머리카락에 시선을 줍니다. 이런 상상을 병원에 계신 동안 몇 번이고 반복하셨을 테지요. 나는 사랑해요. 헌책방 아저씨를.. 그리고 그가 그리워했을 이십 대의 저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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