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미
회피할 수 없는
기억들이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냉정하게 생각하는
비결을 터득하고 있었다.
-백년 동안의 고독 중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번호이동을 하면 무료로 얻을 수 있는 핸드폰을 6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집을 나간 조카들 엄마가 전화할지도 몰라, 일본의 우체국 아줌마가 보고 싶어서 전화할지도 몰라, 출판사에서 번역의뢰를 해올지도 몰라. 이런 ~할지도 모르는 가운데 나는 새 핸드폰을 받았다. 어제는 오전 내내 핸드폰 가게를 순례했다. 조금 더 싸고, 조금 더 할인 혜택이 없을까. 그러던 중 자신이 핸드폰 가게의 주인들 면접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말투, 몸짓, 관상을 말이다. 이 사람 눈동자는 왜 이렇게 불안정하게 움직이지? 이 사람은 3사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잖아 말을 더듬고 있네. 그러다가 한 가게에서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는다. 눈이 사슴같이 까만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회색전화기를 유리부스에서 꺼낸다. 나는 잠시 첫사랑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사랑도 떠올린다.
M의 세계에서는,
사랑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떠올라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것 같이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
M의 세계에서는,
색깔이 살아있다. 인화지에서 현상되기 직전의 어렴풋한 색채. 마블링된 파랑과 빨강, 빨강과 노랑은, 술집 간판이 되고, 비에 젖은 골목길이 되고, 어두운 바의 우울한 조명이 된다.
M의 세계에서는,
연극적 요소가 가득하다. 스카치언더락스를 만들어주는 바텐더에서, 죽은 미미의 독백에서, 무대장치 같은 골목길 루팽카페의 간판에서, M이 애인과 살 새집에서 모든 것이 실제 상황이 아닌 무대장치와 같은 비현실감이 든다.
10시 31분. 꿈을 꾸었다.
누군가 찾아와 내게 물건을 건네줬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라고.(M의 독백)
악몽 뒤 자동응답전화기.
알파벳M에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이름이 들어있지요. 모차르트, 달의 문, 그리고 내겐 크고 높고 빛나는 당신의 이름.(미미의 독백)
햇살 가득한 찻집에서 M은 누군가와 통화중이다.
“돈이 급하다고 사채를 얻어 쓰면 어떻게 해요?”
미스터 M,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하루종일 기쁨에 들떠서 아무것도 못했죠.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물 한잔 마실 수가 없었어요.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어요. 목도 마르지 않았고요. 자리에 누워도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밤새워 몇 시간이고 쏘다녔죠. 미스터 M 당신을 사랑해요. (미미의 독백)
빛으로 가득한 찻집.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던 소설가 M의 등 뒤에 않은 미미의 긴 독백.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M의 독백)
내가 잘못한 게 뭐 있어? 좋아하는 사람 쫓아다니는 것 밖에 없는데.(미미의 독백)
M이 방황하다 찾아들어간 루팽바.
바텐더(전무송분)에게,
안녕하세요. 절 알고 계신가요?
아, 예. 제 가게에 한번 들르셨죠.
아마도 그날 이 자리에 앉았었죠. 기억나시죠?
그게 언제쯤이었는지.
8월 21일 일요일. 정확하게 기억하지요.
11년 전에 제가 처음으로 이 가게를 오픈한 날이죠.
그날 기념으로 집사람과 영화 한편을 봤죠. 제목이 ‘프랜치키스’. 영화가 끝나고 극장문을 나서는데 몹시 비가 내렸죠. 최고 271m 폭우였죠.
그랬나요? 그렇다면 혹시 제가 누구와 왔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아, 예. 글쎄요. 나이가 들면 요즘 여름날씨처럼 정신이 맑았다 흐렸다 찌푸렸다 갰다. 오래전 일도 어제 일 같고 어제 있던 일도 까마득하고. 가끔은 꿈인지 실제인지도 오락가락해서 누구와 같이 왔다 안 왔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네요. 죄송합니다.
M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M은 요즘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컴퓨터 앞에서 뭔가 적고 있다.
less poetic more specific
less poetic more specific
less poetic more specific
M의 이미지는 마치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다.
똑같은 문장을 쓰고 또 쓰고.
어떻게든 소설을 쓰려는 M.
그러나 한 줄도 쓰지 못하는 M.
세상엔 미워하는 눈, 업신여기는 눈, 잘못되길 바라는 눈이 있지만, 미미의 눈은 정말 예쁘고 누군가를 아껴주고 거짓말을 못하는 눈이었다.
M의 회상 속 미미는 흰 백합 같다.
미용실 딸 미미.
미미와의 첫 데이트. 미미를 미용실 앞까지 데려다주던 M.
헤어지기 싫은 연인들. M은 그 마음을 자전거에 담아 크게 한번 원을 그리며 골목 앞에서 멈춘다.
마침내 첫 데이트의 이별할 시간이 찾아오고 M과 미미의 씩씩한 악수, 그리고 키스.
화들짝 놀라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미미.
그새 다시 나와 M에게 날짜를 묻는 미미.
8월 20일 일요일이라고 말해주는 M.
기억 속에 잃어버린 필름 한조각.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것은 미미였다. 애써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던 미미. 미민 내 첫사랑이었다.(M의 독백)
난 나중에 당신이 아주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 재미있는 영화를 보다가도 내 생각이 나서 펑펑 울었으면 좋겠어. (미미의 독백)
더운 여름날 회색핸드폰을 사들고 나오는 내 등 뒤로 안녕히 가세요. 하고 예의 그 상냥한 청년이 인사를 한다. 나도 인사를 한다. 그리고 M과 미미처럼 독백을 한다.
-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날 하늘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노을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나는 오직 당신만 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