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감수성, 깊이에의 강요

by 이은주

나는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분들이 가난해봤으면 좋겠다. 하명희의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도은은 행주로 방을 닦으면 어떻게 하냐고 따지려다 말았다.'(14쪽/사회평론 간행)

봉사자가 봉사를 위해 타인의 집을 방문해서 행주를 걸레로 쓰는 묘사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게 했다.

우리 이러지 말자. 더러워도 그 집 행주는 행주다.

나는 사회복지사나 인권, 자선단체의 사람들이 부자였으면 좋겠다. 아니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상관없이 인권 감수성이 깊어졌으면 좋겠다. 날짜 임박한 우유 말고, 입다 버린 옷이나 필요 없는 물건 말고 가장 소중한 것을 둘로 쪼개는 발상에서 시작하면 미래의 복지가 어떻게 변할지 기대된다.

나는 누군가 돕는 행위가 지나치게 사회적 가치를 지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의 집 방문을 넘어 기껏 쌀 한 포대, 라면 한 박스 앞에서 웃으라고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굶어 죽는 극한의 사람들을 위해 기부를 독려하지 말고, 사람들 또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한 기부가 아닌, 평화로운 마을, 사이좋은 마을, 공평한 마을, 살기 좋은 마을을 위해 재능기부든 물질 기부를 해야 한다는 자각을 했으면 좋겠다.

나는 소통이라고 상호협동 품앗이라는 좋은 말로 돌봄 대상자를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자고 초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우울하다고, 웃고 춤추기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보시라.. 그냥 나눔은 나눔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손자가 내 삶에 들어왔다. 24시간 손자를 중심으로 삶이 재편성되자 나는 경력단절 여성이었고, 누구보다 약한 입장이 되었으며, 육아라는 것이 타인의 도움 없이는 해결 불가능 영역이라는 것을 매 순간 깨달아야 했다. 나는 손자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선물하고 싶었다. 다양한 감정 속에서 가장 적절한 자신만의 감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쁨도 느끼지만, 슬픔도 알아야 하고, 지루하기도 하지만, 엄청 신나고 즐거운 일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는 것도 알리고 싶었다. 그때 손자와 나는 버려진 느낌이었고, 소외된 가정이었고, 사실 무엇이 필요한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는 기분이었다. 양육자인 내가 그런 감정을 느꼈다면, 틀림없이 손자에게도 그런 지난한 감정이 이입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내게 마포 희망 나눔에서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자에게 엄마, 아빠가 있는 가정을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그러자 우리 두 사람 앞에 두 가정이 손을 내밀었다. 첫 만남 때 손자는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서 제 또래의 자매가 아빠아빠라고 부르는 이오를 이렇게 불렀다.

'아빠, 나도 앞자리에 타고 싶어요.' 이오는 그렇게 했다.

이오는 이동시 앞좌석에 두 딸을 번갈아 태워주고 있었는데 손자는 진심 자동차 앞좌석에 타보고 싶었던 5살 남아였던 것이다. 젊은 엄마 홍아는 식당에서 아직 젓가락질이 서툰 아이들을 위해 가지고 온 유아용 고리가 달린 젓가락을 손자의 몫까지 준비해 왔다. 나는 더 이상 궁지에 몰린 가장이 아니었고, 고립되거나 소외된 자가 아니게 되었다. 육아의 어려움을 상의할 친구가 생긴 것이다. 동시에 손자에게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알린 것이다.

2020년은 세 가족이 오랜 시간을 두고 우정을 쌓아가는 장으로 만들고 싶다. 한 달에 한번 정해진 만남이 아닌, 보고 싶어서 만나는 만남으로 항해를 시작할까 한다. 되돌아본다는 것은 기념하고 추억한다는 뜻이다. 지난 3년간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또 배웠다.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은 사람은 그것을 배운 대로 얻은 만큼 행동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양한 혜택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라면박스 앞에서 사진이 찍기 싫어도 거절할 수 없다. 춤. 노래를 거절하기 어렵다. 작년 연말에 마포희망나눔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 세 가정이 축제에서 춤과 노래를 하는 건 어떨까고. 한번 물어본 것뿐이지만 나에게는 역시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으며, 아픈 제안이었고, 왜 그런 보여주기가 필요한지 아쉬웠다. 우린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화합하고 있는데..

상호라면서 주는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보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 소신과는 틀리니 이제 혜택은 내려놓아야겠다. 그렇다고 이오와 홍아와 소원해지면 어쩌지? 그러나 나는 믿는다. 슬픈 일을 공감할 수는 있어도 좋은 일, 기쁜 일을 함께 좋아해 주고, 기뻐해 주는 관계가 진정 위대한 관계라는 것을.. 이제 아이들을 매게로 한 만남은 아이들이 자라면, 아이들이 성장하여 바빠지면 1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할 때가 곧 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을의 어린이를 안아주고, 놀아주고, 사랑해주는 관계로 성장할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간절히 바라는 어린이는 수없이 많다. 학습지 선생을 하면서 반지하에서 임대아파트에서 늦게까지 잔업을 하는 부모를 기다리며 쓸쓸한 밥상에 앉아 무심히 티브이를 보던 어린이를 수없이 보았다. 부모가 있어도, 부모는 어른의 책임을 다하느라 정작 아이들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



덧: 1년 동안 고민해왔지만, 막상 언어로 정리하려고 할 때 마포희망나눔에 누가 되는 건 아닌가 자문해봤어요. 그리고 애정한다. 더 잘 될 것이고 응원할 거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쓴소리를 하나도 듣지 않는 단체가 오히려 고인 물이니까요. 고마워요!


하나 더: 누군가 아끼고 아껴서 기부한 물건이 받아야 할 사람의 손에 잘 전달되었다는 인증샷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앞으로 지원받을 대상자의, 음성인식, 동공인식 등을 모듈화 하는 방안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요양보호사가 돌봄 시작과 끝을 체크하는 앱을 이용하듯이 다양한 방식의 앱을 사용하도록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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