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 소설

그래도

by 이은주

그래도

“아니, 내가 2등급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대학병원도 다니고, 안 가본데가 없어요.”
“그때가 언제인데요?”
“몇 년 됐지요.”
“2등급은 요양원 가실 때나 필요하지 재가방문에는 별차이 없어요. 돌봄 시간도 4시간 그대로 이용하실 수 있어요.”
“아니, 내가 지금 요양원 신청하려고 한다니까요?”
“요양원이요? 아니 손만 못쓰실 뿐 이렇게 건강하신데 요양원을요?”
“아니에요, 요앞 시립요양원은 신청하면 10년 걸린데요. 지금부터 신청해 놔야해요.”
“아니, 10년 일을 지금부터 걱정하시기에요? 그리고 시립요양원에서 일해봤지만, 낮에도 침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시설이 좋으면 얼마나 좋게요.”
“아니요. 그땐 나도 가야지.”

그제서야 어르신의 땀에 젖은 잠바가 눈에 들어왔다. 야윈 노인이 몇 년 전에는 일터에서 포크레인에 손가락 두 개를 영영 못쓰게 다친 이후로 힘들어한다는 걸, 공공근로에 뽑히지 못할까봐 봄에는 시름시름 아팠던 것도 떠올랐다. 28도의 더위에 공공근로에 나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들어와서는 찬 보리차에 밥을 말아 들기름에 볶은 총각김치를 꺼내 싱크대에서 서서 먹는 노인이 말이다. 힘든 일이 힘에 부쳐 매끼 소주 반 병을 벌컥 들이키고 무거운 등산화를 신는 양말이 땀에 젖어있는 노인은 자신의 최후가 두려운 것이다. 아니 자신은 괜찮은데 타인의 도움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내를 두고 어찌할지 걱정에 걱정이 더해진 것이다.

“에이, 걱정마세요. 제가 시립요양원에서 일해보고, 작은 요양원에서도 일해봤지만, 시설이 좋으면 뭐 해요. 자식들 1년에 한번도 안 찾아와도 좋을 정도로 시설이 좋으면 뭐해요. 누워만 계시는데. 차라리 댁에서 돌봄을 받다가 가시는게 좋고 들어가시더라도 아홉 분이 생활하시는 근처 요양원이 낫지요. 주말에는 가끔 자식과 외출도 하고요. 들어가시면 두 분이 같은 방 쓰도록 해드릴게요.”

찬물에 밥을 말아 드시던 노인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그 손이 노인의 전부였다. 공공근로에서 돌아오면 쉬지도 못하고 다시 부엌에서 봄나물을 다듬고, 마늘을 다지는 손. 저녁 상을 봐다 아내와 함께했던 손. 다음주 목요일이면 결혼한 지 50주년이 되는 손이 표정을 가진 것처럼 안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입맛이 떨어졌는지 나머지 밥은 버리고 소주병을 따서 한잔 들이키는 것이었다.
“아니, 술을 드시더라도 뭘 좀 드셔야지요. 그렇게 아무것도 안 드시면 어쩌세요.”
냉장고에서 꺼낸 치즈를 억지로 내밀자 그제서야 한 입에 털어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현관에 앉아서 등산화를 신는 노인의 등은 조금 전의 손과 마찬가지로 긴장이 풀린 듯 보였다.
참으로 마음이 쓰이는 노인이다. 지난번에는 술을 마시고 넘어져 양쪽 정강이가 다 까져서 연고를 발라드리느라 고생했다. 이분이 내 아버지였으면 이렇게 살갑게 연고를 발라드렸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두운 눈을 비벼가며 싫다는 노인의 정강이를 붙잡아 연고를 발라드렸다. 그 모습을 등뒤에서 다 지켜보고 계신 박양자 어르신은 아마 마음속으로 이리 생각하고 계실 것이었다. ‘문딩이, 지긋지긋하게 술은 마시고..’

요양원에서 같은 방 쓸 수 있다는 걸 알고 안도하는 노인들에게 오늘 저녁 평화가 깃들거라는 걸 창밖의 산비둘기만이 알 것이다.

photo by lam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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