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 소설

by 이은주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주시오.’
방에 들어서자 출처가 불분명한 문장이 포스트잇에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옆에는 이런 글귀도 적혀있었다.
‘어른들이 어린 사람의 행동에 대해 선악을 판단할 때 어른 자신을 표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매일 보고 행하려는 의도에서 붙여두었을 것이다. 이 방의 주인은 어린이와 관계된 일을 하나보다 냉장고에도 어린이와 관련된 문구가 엽서에 적혀있다.
‘옳음과 친절함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해야 한다.’
‘지나치게 활달한 마음은 결코 마음이 아니다.’
‘내용보다 억양이 중요하다.’
‘같이 놀아줘, 같이 산책가자, 데려가 줘, 나도 갈래, 내가 하면 안 될까 하는 요구-여러분에게 중요한 이유가 없다면 대답은 오직 하나 “그래.”여야 한다.’

방 주인이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운 동안 집 청소를 하고 식물에 물을 주면 얼마간의 돈을 받기로 한 나는 값나가는 물건 하나 없는 소박한 방에서 책장의 먼지를 털거나 책상을 걸레질하다 돌아오는 것 이외에는 별로 청소할 게 없어서 약간 의외였다. 이 정도면 일주일 후에 돌아와서 해도 될 텐데 왜 이 일을 맡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방의 주인이 궁금했다.
그러나 방 주인을 상상할만한 액자 하나 앨범 하나 없었다. 그저 책장 앞에 서서 책등에 적힌 책제목을 읽어보거나 마음에 내키는 책을 뽑아 읽어보는 정도였다. 이 방에서 체류하는 시간은 약 1시간으로 청소업자가 소개할 때 주문한 대로 창문을 활짝 열어 방안을 환풍해주는 것도 빠짐없이 하고 있다. 이제 5일 남았다, 4일 남았다, 마침내 3일 남은 어느 날 나는 방 주인의 허락도 없이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차 한잔을 마시기로 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홍차가 티테이블에 박스 채 있었고,
방2
그 중 하나의 티백을 꺼내 홍차를 마셨다. 메모지에 홍차 한잔을 마셨노라 메모를 해둘까 잠시 망설이다가 말았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실바람과 홍차향으로 아침의 시작이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한 시간 후면 강도 높은 빌딩청소 장소로 이동을 할 터였다. 차를 다 마신 후 찻잔을 닦아서 키친 타월로 물기를 제거한 후 제자리에 돌려놓자 핸드폰이 울렸다. 나에게 늘 일거리를 주지만 대화다운 대화는 나누어본 적이 없는 말없는 사나이였다.
“저 가능하시면 다음주 1주일 더 부탁해도 될까요?”
“예? 다음주면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하루 쉴까했는데요. 아이들이 자라서 이젠 크리스마스에는 함께 있고 싶어해요. 어린이집에 늦게까지 있는 아이는 자기들뿐이라면서요.”
“사실 그 방 주인은 여행을 간 게 아니라 몇 가지 검사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뜻하지 않게 병이 발견되어 이참에 수술도 함께 하고 나온다는군요. 게다가 크리스마스 전후로 미국에서 우편물이 오는데 그걸 좀 받아주었으면 한데요. 왕복 교통비와 추가 비용을 선불로 드리면 안 될까요? 아이들 선물이라도 사주세요. 근무 시간은 우편물이 오는 9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을 데리고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에 가서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카페에서 뜨거운 코코아와 조각 케이크를 하나씩 사주고 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장난감 같은 건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마트에 사오 만 원은 줘야 마음에 드는 것을 살 수 있기에 두 아이를 데리고 마트 근처는 얼씬도 말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기소리만하게 대답한다.
“그러지요. 근데 얼마나 주실거지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말했다.
“사실 그 방의 주인은 먼 친척이에요. 혼자 살지요. 자식처럼 키운 아이는 미국에 갔는데 소식이 끊겼어요. 소식은 끊겼지만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편지와 함께 소포를 보내오는가 봐요. 기존에 드리는 돈 이외에 매일 12만 원씩 추가 요금을 드리면 어떨까요?”
나는 재빨리 계산을 해보았다. 일주일이면 목돈이 된다. 아이들에게 선물도 사주고 어쩌면 오래전에 떨어진 운동화도 바꾸어줄 수 있겠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예’라고 말해버린다.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두고 예의 소포가 도착했다. 사실 그 방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어서 나는 집에서부터 들고간 털실로 아이들 목도리를 뜨며 소포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아이 다 오렌지색 털실로 뜨고 마지막 한단은 핑크색을 섞어서 마무리 단계에 초인종이 울렸고 소포가 왔다. 물론 수취인 주소만 있고 보내는 사람 주소는 한국 사서함 주소로 적혀 있었다. 미국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사이 한국으로 돌아온 건가. 아무튼 소포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했다. 청소업자는 한참 벨이 울린 뒤 전화를 받았다. 벽제라고 했다. 나는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방 주인이 수술을 받다가 중환자실로 옮겨져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양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있는데 방안의 홍차가 눈에 들어왔다. 청소업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음주 일을 의뢰했다.
“다음주에는 방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유족도 없고 책 이외에는 이렇다할 살림도 남기지 않으셨으니 가구와 가전제품 가져갈 사람을 보낼 테니 나머지 책들은 재활용쓰레기로 버려주세요. 그밖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그때 그때 상의해주세요. 지금은 사정상 끊습니다.”
이미 이번주 임금은 받은 상태에서 다음주 일이 예약되어서 나에겐 좋은 일이긴 하지만 나는 소포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걸 깨닫고 다시 전화를 했다.
“저기 미국에서 소포가 왔는데요.”
“아, 너무 늦었군요. 받으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버려주세요..”
빈방에서 갑자기 맥이 풀린 나는 탁자 위의 소포에 눈을 준다. 버리다니. 혼잣말을 한다. 귀신에 홀린 것 같군. 망자의 커피포트의 물을 끓여 홍차 한잔을 마신다. 홍차를 마시면서 다음주에 처리할 일의 분량을 가늠한다.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을 옮기려면 바퀴달린 가방을 가져와야겠다느니 저, 많은 화분들은 대체 어떻게 어디다 버리는가 싶어 베란다에 나가보기도 하다 벽에 붙은 종이 조각에 손이 간다.
‘아이를 하루에 네 번 이상 안아주라’
나는 그 종이만 떼어내 손가방에 넣고 집을 나선다. 눈이 내렸고 하루에 아이를 네 번 이상 안아주었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photo by lam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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