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 소설

첫사랑

by 이은주


첫사랑과 첫사랑에 대해서 대화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이를테면 자신이 잘 생겼다는 걸 아는 남자였다. 잘 생긴 남자에게는 여성이 먼저 프러포즈하는 일이 자주 있다는 것도 그를 통해 체험했다. 여하튼 그해 나의 목표라고는 책 100권을 읽는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연애를 했다.
친구의 대학 축제에 놀러갔다가 막걸리를 얻어 마시고 버스 정류장에 서있었다. 집 방향 버스를 타러 가던 그가 버스를 그냥 보내고 알코올로 상기된 채 걸어왔다. 아직 소년인 얼굴이 앳되어 보였다.
“우리 사귈까?”
“사귀는 게 뭔데?”
“...”
“사귀는 게 뭐냐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여자는 처음이라..”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흠.”그가 망설이자 마음에 들었다.
“그래.”내가 답했다. 어쩐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그는 나와 사귀면서 사귀는 게 과연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데이트를 하기 위해 집에서 용돈을 받기 위해 돼지 똥을 치우고, 소똥을 치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여물을 주고, 지붕 위의 고양이가 새끼를 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낭만적으로 들렸다.
어느 날 그가 자기 누이의 과수원에 초대를 했다. 서울에서 이십 여 년을 산 도시 아이가 과수원에 초대되었기에 나는 세상에서 아주 맛있는 사과를 대접받을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상품으로 수확하기 어려운 땅에 떨어진 사과를 거두어들이는 일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못생긴 사과를 배불리 먹었다.
한번은 간밤에 잠을 한숨도 못잤다고 했다. 소가 새끼를 낳는데 아무리 송아지 새끼 다리를 잡아당겨도 나오지 않아서 밤을 새웠다고 했다. 난산이었으나 어미소와 송아지 모두 건강하다고도 했다. 또 한번은 집으로 초대하여 놀러갔다. 전형적인 농가였다. 댓돌 위에 고무신도 있었다. 외양간에서 소울음 소리도 들렸다. 돼지 우리에 들어갔을 때는 돼지들이 낯선 사람을 향해 콧물을 흘려가며 코를 벌름거렸다.
그가 즐거워하며 새끼 돼지를 내게 안겨주었을 때는 강아지에게서 나던 어린 냄새가 났다. 아기 돼지 꼬리는 모나미 볼펜을 분해하면 나오는 스프링처럼 달려있었고, 온통 핑크빛이라 만지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물이 들 것 같은 색이었으니까. 그 어린 돼지의 콧구멍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했다. 정말 그 동그란 콧구멍으로 숨을 쉬는지 들여다보았다. 깜짝 놀란 아기 돼지가 꿀꿀대며 엄마를 찾느라 발버둥치자 귀여운 발톱이 눈에 들어왔다. 뾰족 구두를 신은 아기 돼지였다.

“방에 들어가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남자 아이들은 내 친구였지 애인이 아니었다. 그도 사실 사귄다고는 했지 남자 친구였다. 방에 들어가자니 방을 구경시켜주려나보다 했다.
방은 그냥 방이었다. 책상이 있고, 교과서 몇 권이 있는 방.
그가 내 뺨을 감싸고 눈을 바라본다.
내 안경이 조금 삐딱해졌다. 왼손으로 고쳐 쓴다.
“키스하고 싶다.”
“흐흐”내가 기분 나쁘게 웃는다. 나도 모르겠네 왜 그 타이밍에 그런 아저씨 같은 웃음이 나왔는지. 그냥 로맨틱하기보다 촌스러워서 웃음이 났다. 그리고 방을 나왔던가, 아니면 조금 더 그의 삼류소설 같은 대사를 듣고 있다 나왔는지 모르겠다.

음악 다방에 앉아 키스할 순간을 놓친 그가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모르는 척 나는 딴 짓을 하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귀지 말걸. 귀찮아. 애인이 있으면 두근두근 하긴 하는데 불편해.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거야.”
아니 사랑하는데.. 이게 내 사랑이야.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 줄 알아? 도서관에서도 고백을 받고 고등학교 후배도 지난번에 고백을 했다고..”
농담처럼 진담을 하는 이 남자는 필시 바보일 거다. 점점 더 싫어진다.
“난 고등학교 때도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첫사랑은 네가 처음이야. 집에서 생각해봤어.”
이쯤 되면 내가 빌려준 책 언제까지 읽을 거냐고 말할 타이밍이다. 밑줄까지 긋고 함께 읽고 싶었던 책이지만 3개월이 되도록 돌려주지 않는다면 곤란하지. 세계문학전집에 이가 빠지는 거잖아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책은 내 손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와 함께 소, 닭, 돼지, 고양이 이야기가 사라졌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 퍼즐 하나를 영영 찾을 수 없게 된 것이 가끔 슬프다. 첫사랑이었다.

photo by lamb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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