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주 Jun 18. 2021

준비된 가족11

11.

감독님이 보낸 상자를 뜯었다. 상자 안에는 영화세상이 펼쳐져있었다. 영화 팸플릿을 넘겨보며 이건 본 영화, 이건 안 본 영화로 나누고 있었다. 안 본 영화들은 다시 장르별로 나누었고 장르별로 나눈 영화는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순서로 정리했다. 팸플릿 사이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가 한권 들어있었다. 이 책은 절판되었는데 감독님이 가지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책의 첫 장을 펼치며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장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감독님의 편지였다. 에이포 용지에 단정한 글씨로 몇 줄 적혀있었다.


‘현오야 널 다시 만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씨네마천국>의 알프레도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쓰던 캠코더는 수리를 맡겼으니까 수리가 끝나면 현오 네가 쓰도록 하렴. 너는 나의 가족이다. 우린 12년 전부터 준비된 가족이었다.’


<씨네마천국>을 보면서 알프레도 아저씨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홉 살 소년이었던 나는 강아지처럼 감독님을 따랐었다. 감독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먹기 싫은 버섯도 꿀꺽 삼켰고, 들어가기 싫은 갯벌도 들어가 보았다. 나중에 버섯의 맛에 익숙해질 때쯤 발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던 진흙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갯벌에서 넘어져 옷이 더러워지고, 얼굴이 더러워져도 감독님은 샤워장에서 씻으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나는 두려움이 많은 아이였고 소심했지만, 야외에서 라면을 끓여서 컵에 라면을 덜어먹는 일탈이 즐거웠고 멋지게 느껴졌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밤 낙엽이 떨어지던 캠프장에서 모닥불 옆에 모여 앉은 엄마의 얼굴, 감독님의 얼굴을 번갈아 본 적이 있었다. 일렁이는 모닥불 빛이 엄마의 볼을 발그레하게 비추고 있었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마로 흐트러진 머리칼의 음영으로 어두워보이던 감독님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나는 가슴 속에서 밀려드는 어떤 충만함으로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어린아이의 언어로는 신비함에 가까운 어떤 감정을 말할 수가 없어서 하품으로 얼버무리기만 했었다.


‘너는 나의 가족이다. 우린 12년 전부터 준비된 가족이었다’고 적힌 편지를 두 번 접어서 지갑 안 빈 공간에 넣었다. 내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가지고 다닌다면 나는 더 이상 ‘나쁜 아빠’를 가진 아이가 아닌 것이다. 나에게는 ‘멋진 가족, 준비된 가족’이 있고 나 또한 그런 ‘준비된 가족’이기 때문이다.


#어썸01_발탈 #어썸01_6월18일 #어썸01_099_1


1.준비된 가족 /에이포 16장원고지 88.5장

2.너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 /에이포 30장/원고지 180장

3.단편 혹은 에세이 /에이포 27장/원고지 152장

4.도쿄이야기 수정본/에이포 85장 /원고지 498장

(1+2+3/에이포 73장/ 원고지 420.5장)


어썸100을 마치며...

100일 글쓰기는 중독성이 있다는 점. 우선 잡다한 일을 끊어주고 일상생활에 방호벽 같은 걸 쳐줍니다. 오직 자신에게만 몰입할 수 있는 중년의 삶. 신경증, 불안, 좌절, 비애, 이 모든 감정이 일상을 삼키지 않게 지키려고 발버둥을 쳤던 시간들. 100일 간의 동행 감사했습니다.


#어썸01_발탈 #어썸01_6월18일 #어썸01_100_1


photo by lambba

매거진의 이전글 준비된 가족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