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요양보호사가 되면 안 된다

by 이은주

나의 요즘 고민은 요양보호사에 대한 글을 계속 쓸까 쓰지 말까이다. 첫 번째 이유는 함께 일하는 동료 사회복지사로부터 어르신들에 관한 개인정보 노출이 꺼려지니 페이스북에 공개하지 않는 게 좋다는 의견을 들은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선배 요양보호사에게 2시간의 재가방문을 위해 왕복 1시간을 써야하는지 고민이라고 말씀드렸다가 이 일은 사명감이 없으면 못 한다고, 그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당장 그만두는 게 나을 거라고. 아직 젊으니까 다른 일을 찾는 게 좋을 거라는 일침을 받았기 때문이며, 세 번째 이유는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쓰고 있으나 이 책이 과연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부박한 답조차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십 구년 간 나라는 껍질 안에 살아서 내가 이런저런 이유를 달기 시작하면 마지막에는 휙 뒤돌아선다는 걸 알기에 워워워~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중이다.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이 있는 것처럼 나의 말뚝은 너무 얕고 또 너무 줄이 짧아서 일어서려다 주저앉고, 주저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뭐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체념하는 통에 도무지 이렇다 할 원이 그려지지 않고 있다. 뭐 어쩌겠나. 이렇게 생겨먹었는 걸. 게으른 내가 움직일 때는 대부분 작고 약한 것, 어린 것을 위해 먹이를 물어다주거나 보호해 줄 때 뿐인데 마침 손자를 돌보고 있으니 대뜸 피할 곳이 생겨버린 것이다. 손자를 업고 뛰려고 하다가 손자의 등 뒤에 숨으려하는 자신을 본다. 아아 나는 요양보호사가 되면 안 되겠구나 라는 자각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양보호사여야 하는데 말이다.

만날 때마다 시들어가는 엄마가 계시다. 데이케어센터를 믿고 엄마를 부탁한 후 일하러 나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게다가 고분고분 순순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먹고 살았던 엄마가 타인에 의해 꾸며진 일상을 살아낼까도 의문이었다. 그래 내가 요양보호사가 된 것은 애초에 사명감 같은 것은 없다. 단지 나의 엄마를 부탁할 곳, 미래의 내가 의탁할 곳이 궁금했던 것 뿐이다. 또한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립고 그리워 할머니 닮은 분들 곁에 있고 싶어서였다. 사명감은 없는데 만나면 모든 것을 해드리고 싶어 안달을 내는 자신과도 사귀기 힘들었다. 경계를 모르는 나. 늘 경계를 뛰어넘으려고 애쓰는 나는 늘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소심해서 어디에 쓸까 나는.

나는 묻는다.

제 글 어디에 어르신들의 개인정보를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나요. 뮤즈와 제우스의 이름을 빌린 것도 어르신들의 존재를 무명에 가깝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알려주세요. 제 글 어디에 어느 부분이 그렇다는 거죠? 만약 그런 부분이 있다면 삭제하거나 수정해야죠. 저널리즘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동심빌라요? 너무 구체적으로 밝힌 것 아니냐고요? 오오, 동심빌라는 손자가 다녔던 어린이집 이름에서 따온 건데요?

선생님, 사명감이 없으면 안 되나요? 한 시간에 만 원을 받으면서 2시간을 일하기 위해 왕복 1시간을 쓰기 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곳, 교통비가 들지 않는 곳, 언제라도 손자에게 일이 있을 때 달려갈 수 있는 동선으로 시간표를 짜고 싶은 사람은 이 일이 하기 힘든 걸까요? 저는 그냥 좋아서 하는데요. 양손 마비인 뮤즈와 산책하는 길에서 잊고 있었던 풍경과 만나는 걸 좋아하고요, 아무 대화도 없이 겨울 벤치에 앉아 보온병의 물을 나누어 마시고 새들 지저귀는 소리를 듣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뮤즈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부축을 하면서 사람의 겨드랑이가 이렇게 따스했던가고 감탄을 하는 게 좋고요. 산책 후 무거운 겨울옷을 훌훌 벗고 땀을 흘리며 뮤즈의 발가락 사이사이를 닦아드리고 나서 물기를 닦아드릴 때의 개운함이 좋거든요. 또 뮤즈의 안방에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리면서 신문지를 펴놓고 손발톱을 공들여 깎아드리는 것도 저는 좋습니다.

가장 가까운 동료가 내 글을 읽고 공감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일간지를 읽듯 내 글의 단점만을 언급했을 때 나는 벌써 지쳐있었는지도 몰라요. 오해를 위한 오해라고 할까요 타인을 믿지 못하고 상도라든가, 상식이라든가, 어떤 암묵적 약속 같은 것이 사라진 사회에 나는 살고 있구나 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면 피해 입지 말아야지, 사건에 휘말리지 말아야지, 내가 책임지지 말아야지 라는 사회 속에서 나는 과연 나의 목소리를 잃지 않고 낼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어졌어요.

멀리 부산 요양원에서 정기적으로 블로그에 다녀가며 응원해주시는 선생님 고마워요. 어쩌면 당신이 나의 가장 가까운 동료인지도 모르겠어요.


2018. 12. 23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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