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타씨와의 하루

by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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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구보타씨가 2박3일 짧은 일정으로 서울에 체류할 동안 교보문고에 함께 가기로 한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손자를 보던 나는 아침에 어린이집으로 손자를 데려다주고 약속 장소인 토요코인 호텔 로비에 10시반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문제는 손자가 서두르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어린이집에는 안 간다며 떼를 쓰는 것이다. 타일러도 보고 으르렁 거리며 화를 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구보타씨와의 서점 동행을 내심 즐거워 하던 터라 세탁소에서 드라이해 온 청색 바바리코트에 회색 바지를 차려입은 내 어깨에는 노란색 어린이집 가방이 거북이 등처럼 붙어 있었다.


집에서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책에는 손도 못 대게 하며 놀아달라는 손주의 이미지는 언젠가 헌책방에서 산 네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오랑우탄 사진을 연상하게 한다. 따지고 보면 부모하고 있어야 할 시간을 종일 남의 손에만 맡겨서 될 일도 아니지, 아들아 서점에 가면 동화책이 많으니까 재미있을 거야. 그리고 한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을 듣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말을 잘 들으면 아이스크림도 사줄게. 그렇게 해서 구보타씨와 손자와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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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에 도착한 우리 셋의 목적지는 같았다. 그림책이 있는 곳.

교보 직원들은 친절했다. 구보타씨가 원하는 걸 내가 통역하자 한국의 여러 그림책을 소개해주었다. 그중에서 '파도야 놀자'라는 이수지 작가의 책을 마음에 들어 한 구보타씨는 이번에는 이작가의 다른 그림책을 보고 싶다고 한다. 이번에도 교보 직원들의 도움으로 '거울 속으로''그림자 놀이''동물원''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토끼들의 복수'를 차례차례 훑어 보는 동안 손자는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고, 마치 어린이집에 와있는 것처럼 한켠에 마련된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서 소리나는 그림책을 여러 권 가져다 놀고 있다. 동물소리, 음악소리, 전화벨소리가 나는 동안 나는 손자의 안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잘 놀고 있다는 뜻이니까. 구보타씨는 '파도야 놀자'라는 책의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더니 할 이야기가 많아 보이는 얼굴이다. 그의 직업은 대학에서 동화작가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이니까. '그림자 놀이'를 펼치며 "이 책에 있는 그림자를 거울에 비춰보면 현실과 같이 보이도록 만들어졌군요." 하며 즐거워했다. 새학기가 시작되면(일본은 4월에 학기가 시작된다) 구보타씨의 수업에서는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이 등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책을 샀다. 이윽고 점심시간. 우리는 거리를 거닐다 삼계탕 집으로 들어갔다. 마침 어린이집 가방에 들어 있던 어린이용 식판도 있던 터라 손자에게는 식판에 고기와 밥을 덜어주고 혼자서 먹게 했다. 아이는 맛있게 먹는다. 김치도 달란다. 빨간 김치를 빈 밥공기에 담긴 물에 씻어서 잘게 찢어 수저에 얹어주자 구보타씨가 신기해 한다. 한국의 아이들이 매운 김치를 먹을 때 물로 씻어 먹는 것을 처음 본 것이리라.

날씨가 쌀쌀했다.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윤동주문학관에서 오후를 보낼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의 낮잠시간이기도 했다. 구보타씨는 어디 카페에 가서 오늘 산 이수지 작가의 책들을 번역해 주길 원했다. 낮잠시간인 아이와 책 번역이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오후의 주문이면서 가능할 것도 같은 주문이기도 했다. 아이가 잠든 사이 그림책에 있는 텍스트를 구보타씨에게 이야기해주면 되는 것이다. 옷 속으로 스미는 매운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온돌이 있는 찜질방으로 향했다. 동대문에 있는 찜질방은 외국에 온 것처럼 중국어와 일본어가 허공에 떠다닌다. 아이는 발가벗고 즐거워한다. 이래선 낮잠을 자지 않겠는걸.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나는 바디샴프를 하나 사서 아이와 둘이 나누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닦은 다음 따스한 온탕으로 아이를 이끈다. 올챙이처럼 엎드린 아이의 가슴을 받치니 힘껏 발차기를 한다. 깔깔대며 물보라를 만들고 자신의 작은 손으로 반쪽짜리 세수도 하고 나에게 안겨 내 목의 목걸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펜던트를 만지작 거리다가 내가 쓴 안경을 벗겨서 자신이 써보기도 한다. 마치 오랑우탄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이윽고 하품을 하기 시작한 아이를 데리고 온돌이 있는 찜질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구보타씨에게 간다.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낮잠을 자는거야. 하고 약속을 한다. 아이스크림을 입으로라기 보다 얼굴로 먹는 것인냥 아이는 턱이며 인중, 코, 마침내 손목으로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아이스크림 먹기를 끝마치고 입주변도 깨끗이 닦은 아이에게 나는 속삭인다. 자, 이제 가서 자는 거야. 아이는 잠을 잘 때 담요가 있어야 잔다. 나는 찜질복 위에 입고 있던 아이보리색 가디건으로 아이의 담요를 만들어주고 아이는 순순히 온돌에 누워 뒹굴뒹굴 하다가 잠이 든다.


먼저 '파도야 놀자'를 펼쳐든 구보타씨는 책장을 넘긴다.

테이블에는 종이와 펜이 놓여 있다. 이때 중국인 남자가 다가와 구보타씨에게 말을 건다.

남탕이 어디인가. 묻는 것이리라. 말이 안 통하는 구보타씨가 일어나 남탕으로 중국인을 안내하는 동안 간신히 한가해진 내가 책들을 살핀다. 구보타씨가 다시 돌아와서 나는 '파도야 놀자'의 짧은 텍스트를 번역해준다. 이때 또 다른 중국인이 내 눈앞에 물통을 흔들며 중국어로 묻는다. 내가 알아 들을 수 있는 건 maile. '사다'라는 뜻이다. 아, 물을 사고 싶은데 어디에서 파는지 묻는구나. 이번에는 내가 일어서서 매점을 안내한다. 다시 돌아와서 다른 책들을 살펴보지만 그림책에는 텍스트가 거의 없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올해 탄생 120주년이 되는 미야자와 겐지와 오사키 미도리에 대한 화제로 옮겨간다. 그들 두 작가는 소리를 들으면 빛깔이 느껴지는, 두 개 이상의 감각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는 공감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미야자와 겐지가 4차원을 이야기했다면 오사키 미도리는 7감(七感/센스)에 대한 시를 썼다고 한다. (7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기에 집에 와서 찾아 보았더니 어떤 한의사의 인터뷰에 이런 설명이 있었다. 칠감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오감(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의 다섯 가지 감각)에다가 소뇌의 위치감각. 즉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어느 손을 들었는지 아는 감각과 전청신경계의 평형감각을 통틀어 칠감이라 한다.) 그러나 오사키 미도리가 말하고 있는 7감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설명이었다.

내가 흥미로워 하자 구보타씨는 하마노 사치 감독이 오사키 미도리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으며 기회가 되면 DVD를 구해 보내주겠다고 한다. 오사키 미도리 작품은 에코다 문학지 의뢰로 2009년에 단편 '귀뚜라미 아가씨'를 번역한 적이 있다. 그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저는 일 년 내내 귀뚜라미에게 신경이 쓰여요. 게다가 저는 일 년 내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일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빵은 필요하지요. 그러므로 저는 연중 전보로 엄마를 놀라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편지나 엽서는 낯간지럽고 귀찮습니다. 엄마는 시골에 살고 있지요. 중략. 어머니란 그 어떤 세상에서도 그다지 좋은 배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딸이 정신병을 앓으면 어머니는 몇 배나 되는 마음의 병에 걸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아아, 피오나 맥클리오드! 당신은 여류시인으로서 살아 있는 동안 과학자에게 하나의 주문을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나요-안개를 마시며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 저는 연중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번역을 하는 내내 오사키 미도리의 비명이 들렸던 것 같다. 공감각이 뛰어난 오사키 미도리는 귀뚜라미 소리에 밤이면 잠못이루고 괴로워했으리라. 마치 뭉크가 죽을 것 같은 발작 상태로 빠지게 한 노을을 보며 '절규'를 했던 것처럼. 뭉크 또한 강렬하게 불타고 있는 하늘을 보며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노을을 본 후 그가 남긴 글에서 나는 그런 징후를 느낀다.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불현듯 우울함이 엄습했다. 하늘이 갑자기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죽을 것 같은 피로감에 멈추어 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검푸는 협만에 마치 화염 같은 핏빛 구름이 걸려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혼자서 불안에 떨면서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라고 뭉크는 쓰고 있다. 이들은 소리와 색을 보고 반응한다. 이 소리와 색이 언어로 또는 그림으로 표현될 때 가공할 만한 힘으로 폭발하는 것이다.


구보타씨와의 대화는 바로 전날까지 이어지던 위험한? 노동, 뷔페 홀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접시들을 나르고 뛰어다니는 통에 아킬레스의 통증과 어깨 근육통으로 욱씬욱씬 쑤시는 내 육체의 고통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여러 가지 감각들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 조금 더 부지런히 책을 읽자, 조금 더 시간을 내서 일본 작품을 소개하는 데 에너지를 쏟자. 조금 더 잠을 줄여서라도 글을 쓰자고.


구보타씨와 이야기는 하면서도 계속 잠든 아이를 주시하던 나는 한시간 반을 푹 자고 일어나 낯선 찜질방에 일어나서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멍하니 있는 손주를 안아주며 가디건으로 감싼다. 아이의 발그레한 볼이 내 가슴에서 나는 심장소리를 느낀다. 잘 잤니, 엉덩이와 등을 토닥여준다. 아이는 내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는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하나가 되어 잠시 서로에게 기댄다. 안심이 된다. 의지가 된다. 미래에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와 같은 일은 벌써 문제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되겠지...


구보타씨의 제안으로 우리는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로 한다. 우리는 만두집에 들어가 칼국수와 갈비만두와 튀김만두를 시켜서 나누어 먹는다. 아이는 갈비만두를 여덟개나 먹어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내가 아저씨에게 소리가 나는 뽀로로 그림책을 사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게 하자 아이는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한다. 아이는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구분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렇기도 하겠지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 나에게 늦둥이를 가졌냐고 물어들 보니까. 전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아이는 계속 질문을 한다. 그러다가 전철에 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얘는 어디가?' 고 묻는다. 처음에는 누구를 말하는지 몰라서 내가 자꾸 누구냐며 되묻자 전철에 앉은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다. '아기 공룡 둘리'를 너무 보여주었나 싶다. 길동이와 둘리와 도우너가 '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니까 손자는 모든 사람들을 '얘'라고 부르는거라고 학습한 것이리라. '얘라는 말은 어린이집에 있는 친구한테 쓰는 거야. 아저씨나 아줌마는 얘라고 부르지 않는 거야. 아저씨는 어디 가는 거야, 누나는 어디 가는 거야 하고 말하는 거야. 그리고 저녁이 되면 사람들은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거야. 네가 지금 집으로 가는 것처럼.' 아이는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눈을 깜박이며 창가에 붙어서 어두운 터널에 가려 거울이 되어 버린 유리창에 두 손을 올린 채 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2016/3/10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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