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으면서 접시에 이가 나간 것을 발견했을 때처럼 그냥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구보타씨와의 짧은 여행 후 집으로 돌아와서야 깨달았다.
처음에는 뭐야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야 뭐야. 췌장이 전혀 움직이지 않다니.. 3년 만의 재회였다.
췌장이 움직이지 않아서 탄수화물 분해를 못하기에 50g정도의 밥을 먹는다고 한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이후 술자리는 나가지 않고 거의 성직자와 같은 바른생활을 하는 대신 책읽을 시간이 많아졌다고 웃었다. 실감이 나지 않는 병이었기에 따라 웃었다.
구보타씨를 따라 웃으며 새로 생긴 토요코인 호텔 2호점 로비 의자에 보온병이 담긴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모자를 벗는 나. 늘 무표정에 가까운 구보타씨가 짧게 자른 회색머리를 가리키며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손자가 벗어버린 마스크와 장갑과 목도리를 한번 들었다 놓는 나.
이번 방한 목적은 청주고인쇄박물관 견학이었고 나는 그의 길동무를 자청했다. 물론 손자도 함께. KTX를 타기 전에 구보타씨가 건넨 것은 시미즈 선생님의 도스또예프스끼 연구 50주년을 기념하며 만든 책자였다. 선생님의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와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번역한 나도 한꼭지 썼고, 구보타씨 원고도 실려 있어서 우리는 시미즈 월드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미즈선생님은 러시아 문학 연구가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던데 구보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러시아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지 못하는 비판도 받고 있잖아요. 저도 일본어를 잘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문학자들이 높은 성벽을 쌓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일본은 외국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어서 그래요. 에도시대에는 좋아한다라는 말은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이 없었어요. 메이지 시대에 외국문학 학자, 외국어 전문가가 번역어를 새로 만들었거든요.
과연 구보타씨 다운 답변이었다. 자신이 애정하는 담당교수에 대한 비판을 모르는 척 하지도 않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또한 사회적 맥락에서 조명하고 있었다.
전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지 않은 것들』를 시미즈선생님과 똑같이 한줄 한줄 읽으며 옮겼잖아요.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 읽기의 재미를 더해주었어요. 딸이 몸을 판 돈으로 술을 마셔버릴 수밖에 없는 마르멜라도프의 고통, 의붓딸을 팔아서 자신의 아이들을 먹이고 입혀야 하는 까체리나의 고통, 어쩌면 자신의 딸이 몸을 판 첫 남자일지도 모를 상관이 마르멜라도프를 복직시켰을 때 기뻐하는 까체리나의 이중적인 모습, 그리고 그 더러운 돈을 한푼도 남김없이 술로 마셔버리는 마르멜라도프의 절망을 말이죠.
구보타씨가 웃으며 화제를 바꿀 때도 나는 그의 췌장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히끗히끗한 수염으로도 야윈 뺨을 감출 수는 없었다.
호텔 앞까지 바래다주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그가 다시 나와 손자를 배웅하러 전철 출구까지 따라나왔다. 바로 전에 로비에서 한가롭게 발장난을 치며 앉아있는 손자를 바라보며 가벼운 지적장애로 언어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라고 구보타씨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을 때조차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내 눈앞에는 수척해진 한사람의 동화작가가 하루종일 짧은 다리로 종종 걸음치며 멀리 청주의 고인쇄박물관까지 다녀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정으로만 생각했다. 언제나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작별이라고...
구보타씨가 췌장 문제로 생명에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와 헤어지고 와서 노안으로 침침한 눈을 비비며 낮동안의 대화를 떠올려보며 짐작할 뿐이다.
생각해보니 구보타씨가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것은 십여 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집은 아직도 저녁이면 촛불을 켠다고 한다. 그의 세례명은 루카(빛나다라는 의미).
저녁식사 중에 루카가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미덕이 있는데 사람들이 힘들다고 할 때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중에 편지를 쓴대요. 이 화폐는 아주 오래된 것인데 짐정리하다 발견해서 당신에게 드리는 겁니다 하고. 내가 너에게 준다라고 하지 않고 드린다는 표현을 한다고.
양은냄비에서 닭한마리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겨울엔 역시 뜨거운 국물이 최고야. 하며 내가 후룩후룩 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서 말했다.
그런 문화는 한국에도 있어요. 저희 할머니도 그러셨던 것 같은데.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저는 돈을 책틈에 잘 끼워두는 편인데 가끔 잊어버리고 있다가 책을 펴면 돈이 나올 때가 있어요. 마침 가난한 선배에게 책을 주기 전에 한번 주르륵 훑어봤는데 거기서 돈이 나오는거예요. 그래서 편지를 썼어요. 이 책에서 나온 돈이기에 함께 보낸다는. 그런데 저의 결말이 좀 세련되지 못해요. 아 글쎄 다음에 만날 때 선배가 돈을 돌려주는거예요. 제 마음도 모르고..
루카의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바라볼 때까지 나는 그의 췌장에 대해 잊고 있었다. 그저 동화작가는 감수성이 참 좋구나 하고 감탄할 뿐.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언어는 깊이 읽기를 해야한다.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죽음이 문턱에 와있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병에 걸려서 죽음을 늘상 인식하며 사는 사람의 언어는 그래야 할 것 같다. 루카가 건넨 넙적한 봉투. 그 속에는 18년 전에 사용했던 한국돈이 들어있었다. 자신이 짐정리를 하는데 어디에선가 나왔다고.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세련되어서 나도 세련된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루카, 방금 러시아 사람들 이야기는 지어낸 건가요. 라고 말하려던 것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나서 속인인 나는 저녁밥을 미리 계산해서 다행이야 하고 안도하는 것이었다.
뭐야 나는 최인호의 술꾼처럼 이사람 저사람의 술잔을 받아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는 건가. 이런 자의식, 이런 순간에는 없어졌으면 좋겠다. 나도 러시아 사람들처럼 대륙인답게 하하하 웃으며 친구의 진심을 받아들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울 수 있다면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다.
*러시아 민화를 다시 쓴 구보타씨의 동화가 내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된다고 한다.
2018/12/10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