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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Jul 14. 2024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멘야산다이메>

멘야산다이메, 대학로

나는 한겨울에도 국물을 먹으면 땀을 뻘뻘 흘리기 때문에, 친한 사람이 아니면 외식 메뉴로 국물 요리는 먹지 않는다. 휴지로 이마에 밴 땀을 닦으며 어설픈 젓가락질로 건더기를 집요하게 건져먹는 내 모습이 추잡해 보일까 봐 겁이 나서 그렇다.

그녀와 처음 만난 날도 그랬다. 회사 동기가 주선한 소개팅 비슷한 거였고, 그녀와 나는 머쓱한 얼굴로 걸어 다니며 저녁은 뭘 먹을까요? 등의 시덥잖은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녀가 썩 마음에 들었고, 다음 주 주말쯤 한번 더 만나고 싶었다.


- 요 앞이나 길 건너에 파스타를 먹을까요?

-파스타… 정말로 드시고 싶으셔요?

- 그러면 저 너머 초밥집에 갈까요?

- 꼭 그렇게 비싼 곳으로 안 가도 괜찮아요.


망했구나. 우리는 결국 바로 앞에 있던 정체불명의 밥집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여기서 어떻게든 대화를 잘 이어나가 다음 약속을 잡아야 했다. 야구로 치면 2-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6회초가 시작된 것이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나는 필승 계투조를 연달아 마운드에 올렸다. 나는 평소 먹지도 않는 야채 볶음 메뉴를 먹었고-결국 다 남겼다-, 그녀는 연어 덮밥을 먹었다. 연어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니 그러면 초밥집 가잘때 가지.

불펜 투수들이 연달아 마운드에 올라 계속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졌고, 그때마다 그녀가 매너 좋게 웃어 주었다. 그렇게 소득 없이 7,8회가 지나가고, 어쩌지 어쩌지 하는 동안 식사를 마친 그녀가 앞장서서 계산대에 서더니 카드를 내밀었다.

진짜 망했구나. 혹사당한 투수가 어깨를 부여잡고 쓰러지고, 성난 관중들이 내게 참외를 던져댔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추운 날이었다. 눈이 덜 녹았었나?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가 초록색 코트를 입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숏 컷이 잘 어울리는 옆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글쎄 갑자기 왜 그랬을까, <슬램덩크> 소연이처럼 불쑥 말을 꺼냈다.


- 라멘, 좋아하세요?

- 오! 멘야산다이메 좋아해요.

- 논현동이요, 홍대요?

- 대학로요.


숏 컷 아래로 귀걸이가 반짝 빛났었나? 턱을 한 번 만졌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그녀가 웃었던 것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지금껏 보여준 매너 좋은 웃음이 아니고 정말로 웃었다. 아직 안 망했구나! 나는 만난 지 오 년은 넘은 성대 출신의 친구를 팔아먹으며, 대학로와 멘야산다이메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 돈코츠만 먹어요. 어머 전 카라구치도 좋아해요. 매운 거 좋아하시는구나아. 네 그럼요. 사실 교자도 먹어요. 그럼 다음에 그렇게 세 개랑 맥주 마시러 갈까요…

다음 약속을 확정 지으며 그녀는, 친구들이 말하길 소개팅에 나가면 세 번은 만나봐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말했다. 좋은 친구들이구나. 다음 시합이 잡혔다.


이주일 뒤에 열린 2차전, 우리는 약속대로 혜화역 앞에서 만났다. 그녀는 노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조금 어색하게 웃는 얼굴의 잔상이 길게 남았다. 코트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려다가 참고, 그럼 우리 그때 말한 라멘 먹으러 갈까요? 말했다.

처음 가본 대학로점은 논현동 지점보다도 더 좁아서, 우리는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어깨가 슬쩍 부딪혔다가 어색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돈코츠와 카라구치, 교자와 생맥주는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새 어깨를 붙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음식을 먹었다. 이상하게 어색한 젓가락질도, 입에서 날 마늘과 파 냄새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흔치 않은 일이다. 교자의 튀김 부스러기를 집어서 이거 꽤 맛있어요, 하며 아무렇지 않게 먹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진짜 웃음이구나. 2차전은 이겼다.

그녀는 처음 약속한 대로 내게 세 번의 기회를 주었다. 야구팬인 것을 눈치챈 걸까? 나는 화이트데이 저녁, 군자역 인근에서 투 아웃 풀 카운트에서 간신히 끝내기 안타를 때려서 3차전도 간신히 이겼다. 위닝 시리즈다. 속 타던 선수들과 애끓던 관중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쏟아져 내려와 춤을 추는 동안, 우리는 연인이 됐다.


멘야산다이메를 또 방문한 것은 연인이 되고 한 달쯤 뒤였다. 꽤 따뜻한 날이었고, 우리는 돈코츠와 쯔께멘, 교자와 생맥주를 시켜서 신나게 먹고 마셨다. 짜고 뜨거운 돈코츠 국물에 이마에 땀이 송송 솟았다. 날이 풀렸구나, 부끄러워지려는 찰나에 아무렇지 않게 그녀가 냅킨을 건네주었다. 마주 앉아 국물을 먹다가 이마의 땀을 닦으라고 건네주는 냅킨 한 장 때문에 어떤 남자는 결혼을 결심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 해 겨울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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