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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Jul 07. 2024

<신토불이>와 <바로그집>

황순애신토불이떡볶이, 중곡동


연애 기간이 일 년이 넘어가면, 슬슬 서로의 취향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 온다. 토요일 데이트를 이촌동에서 할 것인가 성수동에서 할 것인가? 냉동삼겹살을 먹을 것인가 초밥을 먹을 것인가? 타란티노를 볼 것인가 홍상수를 볼 것인가? 보통 그쯤 된 커플은 중간 지점에서,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게 된다. 이를테면 한남동에서 만나 치킨을 먹고 봉준호를 보는 식이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이 커플은 그동안 해온 일이 그저 회피였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면, 꼬들한 너구리를 먹고 싶은 여자와 신라면에 달걀을 풀어 진득하게 먹고 싶은 남자 사이에는 제3의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나의 냄비에는 하나의 라면만 끓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해 갈 수 없는 사상 투쟁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신념이자, 그동안 나의 냄비에 끓여 온 라면의 역사이기도 하다. 많은 커플이 자아비판과 게릴라 침투, 인민재판과 숙청을 거쳐 결국 이별 수순을 밟는다.


정현종의 시처럼,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다. 그곳에는 한 인간이 먹어온 역사와 드나든 식당의 추억도 함께 딸려오기 마련이다. <인사이드 아웃 2>(2024)를 보며 생각했다. 사춘기 인간 자아 형성의 가장 큰 줄기는 아마 동네 떡볶이집일 것이라고.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떡볶이집을 매주 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추억의 떡볶이집을 거쳐서, 기어코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이란 두 가지 떡볶이가 만나는 일이다.


대전에서 자란 사람들 대부분 그렇듯, 내 자아를 형성한 것은 <바로그집 떡볶이>.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전혀 하나도 없는데 10대 내내 먹었기 때문에 자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만약 내가 해운대에서 자랐다면 진한 고추장 양념의 <빨간떡볶이>를 마음에 품었을 것이다. 그쪽이 내 입맛에는 더 가깝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어쩌다 보니 현재의 자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상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광진구 토박이인 아내의 자아를 형성한 것은 중곡동 <신토불이 떡볶이>. 자른 핫도그를 떡볶이 양념에 묻혀 먹는 점이 특이한 가게. 연애를 하고 일 년쯤 지났을 때, 우리는 그곳을 방문했다. 추운 날이었다. 김 서린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기어코 한 접시의 떡볶이를 두고 마주 앉은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것은 한 인간의 본질을 알아가는, 그리고 두 인간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만약 함께 신토불이 떡볶이를 먹지 않았다면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결혼한 지 일 년 사 개월이 된 지난주, 나는 바로그집 떡볶이 소스를 인터넷에서 주문했다. 살짝 데친 쌀떡과 오뎅, 그리고 라면과 김말이, 삶은 계란을 소스와 버무려 살짝 볶았다. 익숙한 냄새가 나고, 나는 대전의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냄비를 열기 전에 이미 조치원쯤 도착했던 것 같다.


아내와 바로그집 떡볶이 앞에 마주 앉아 라면을 먼저 한 입 먹으니 허 참, 헛웃음이 나는 맛이었다. 그 맛 그대로다. 아내는 이거 오빠 취향 아닌 것 같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인간은 누구나 어쩌다 보니 현재의 자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20여 년만에 서울에서 만나는 어릴 적의 자신은, 꽤나 그립고 뭉클한 모습이었다. 인류는 이런 식으로 발전한다. 추억을 냉동식품으로 만들어 온라인 커머스로 판매하면서 말이다.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아내와 내가 연애할 적 가장 좋아했던 떡볶이가 그 아이의 떡볶이 기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곳은 신토불이도 바로그집도 아닐 것이다. 대학로 에쵸티 떡볶이나 이수역 태평분식이 유력한 후보일 것 같은데, 어쨌든 그 떡볶이는 어쩌다가 둘이 만나서 결국 하나가 된 그런 맛이 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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