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km 슬로우 커브의 아름다움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좋아한다. 임순례 감독의 한국판도 굉장히 좋지만, 일본 원작 영화를 더 좋아한다. 그 영화는 시골에서 농부로 사계절을 보내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느리고 정확하게 사는 삶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그 행복해지기 위한 여러 방법 중 주인공은 가장 느리지만 정확한 방식을 선택한다.
느리고 정확하게 살고 싶다. 피곤한 만큼만 자고, 일한 만큼만 벌고, 계절이 바뀌는 속도에 내 몸을 맞춰서 살고 싶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 지하철에 실려 팔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정확하지도 않은 삶을, 마음만 급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 가장 좋아한 투수는 이글스의 정민철이다. 나의 첫 번째 에이스였던 정민철은 큰 키와 큰 손(선동열이 부러워했다는), 그리고 강력한 직구로 90년대를 풍미했던 투수. 사실상 두 개의 구종, 직구와 커브로 완투를 밥 먹듯 했던 이글스의 우완 에이스. 그런 투수를 보통 ‘정통파 투수’라고 부른다. 부정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정통파 투수’는 무조건 타고나야 한다. 신체 조건이 탁월하든, 구속이 잘 나오든, 어쨌든 타고나야 한다. 나는 정민철의 긴 팔다리, 멋진 외모를 정말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했던 것은 포수 미트에 펑펑 꽂히던, 당시에 ‘회초리 직구’라고 불리던 그 빠른 직구였다. 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저런 직구를 던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베어스에서만 11년을 뛰며 100승을 기록한 유희관이라는 투수가 있다. 요즘은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야구팬이 아니어도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는 두 가지로 유명하다. 괴랄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느린 볼.
그는 아마 자신의 구속을 농담 소재로 써먹은 두 번째 투수일 것이다.(첫 번째는 자학 개그로 유명했던 차명석 현 트윈스 단장이다) 130km대의 최고 구속을 가진 투수가 10년 넘게 뛰면서 100승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제구력이 좋고 변화구를 잘 던진다는 뜻이다. 그는 공 반 개씩 계속 구석으로 집어넣으며 심판과 스트라이크 존을 가지고 끊임없이 협상을 해나가며, 결국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투수였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비 정통파 투수(보통 기교파 투수라고 부른다)라는 얘기인데, 그 ’비 정통성‘에 꽂힌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언젠가부터 자꾸 입 속에서 너무 늦었다, 를 되뇌는 일이 많아졌다. 어떤 일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고, 또 어떤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 이따금 거울을 보면 모르는 아저씨가 서 있다. 알고 보면 저 아저씨가 진짜 나를 잡아먹고 내 행세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한다. 남은 인생, 잘 가고 있는 게 맞나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면서 나는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나는 150km가 넘는 패스트볼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내가 롤 모델로 삼아야 할 사람은 정민철이 아니라 유희관이라고.
따지고 보면 느리지만 정확하게 가는 것이 정통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투구는 뭐가 됐든 전부 투구다. 요리파 주방장, 연기파 배우가 없는 것처럼 투수는 모두 투수다. 각자의 마운드에 서서 78km짜리 슬로우 커브든 160km짜리 패스트볼이든 능력껏 취향껏 던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트라이크 존에 정확하게 집어넣는 것이라고, 안타를 맞는 것은 그다음 일이라고, 퇴근길 지하철의 인파 속에 낑겨 팔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자꾸 꺾이는 무릎을 애써 일으켜 세우며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