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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Jul 15. 2024

ABS와 터미네이터

공정하고 재미없는 기계의 시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공상과학 그림을 참 많이도 그렸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라든지, 대기오염 걱정 없는 해저 도시라든지 하는 것들. 돌이켜보면 초등학생들 장래희망 TOP2가 대통령, 과학자였던 시절이다. 대전 엑스포 때문인가? 20세기말의 사람들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밝은 미래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외국의 몇몇 비뚤어진 사람들은 <공각기동대>니 <터미네이터> 같은 어두운 상상을 하긴 했지만.


인공지능이니 자동조작이니 하는 말이 내 생활 속으로 들어온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영화에서나 보는, 미국인들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거 가만 생각해 보니 조금 있으면 내가 직업을 잃게 생겼다. 얼마 전에는 관련 기술 시연을 들으며 우와 신기하다, 해놓고 돌아서보니 쟤가 우리 회사에 오면 내가 필요 없을 것 같다. 장기적으로 보면 걔가 나보다 저렴하겠지. 임금이니 복지니 고민할 필요도 없을 거고.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데, 나만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판을 돌려서 듣는 음악이 좋고, 하루종일 여럿이서 탁구 치듯 주고받는 텍스트보다 하루 일과 마치고 한 사람에게 느긋하게 거는 전화가 더 좋다. 그러다 보니 전화기로 전화를 걸고,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사진기로 사진을 찍던 시절은 얼마나 명확하고 쾌적했나? 하는 같잖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프로야구도 마찬가지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


올해부터 프로야구에 ABS, 자동투구판정시스템이 도입됐다. 한 마디로 스트라이크 볼 판정을 기계가 하고, 구심은 판정 결과를 그라운드에 전달만 하는 것이다.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대다.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리니(구장 내에서는) 볼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화를 낼 대상이 없어졌다. 항의할 대상을 잃어버린 타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경로의 볼에 삼진을 먹고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쓸쓸히 타석을 떠난다. 순간적으로 울컥 화를 내려다가 대상이 없는 것을 깨닫는 타자들도 가끔 보인다.


볼 판정을 기계가 해서 얼마나 공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그래도 오심 조작은 하던데),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재미가 없어질 것 같기는 하다. 무조건 예전이 좋다고 우기는 노인이 된 기분이라 좀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볼 판정에 항의하다가 타자가 방망이를 집어던지고 감독이 달려 나와 배치기를 하던 시절의 야구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졌다고 바둑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까. 그럴 거면 왜 한화 문동주가 160km 던졌다고 난리를 쳤던 걸까. 기계팔이라도 데려오고, 하다못해 <미스터 고>처럼 고릴라를 훈련시켜서 야구선수로 뛰게 하면 의미 없는 수치 아닌가 싶다.


인생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 야구는 재미를 위한 공놀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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