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볼의 정치학
프로야구 중계사에서 경기는 없고 편성할 내용도 마땅치 않을 때 자주 쓰는 소스가 ‘벤치 클리어링 모음’이다. 가장 재미있는 것이 싸움 구경이라지만, 가만히 보면 대부분의 벤치 클리어링은 빈볼에서 시작한다. 분쟁의 씨앗이자 선전 포고라는 말이다. 타자 머리 쪽으로 공을 던지면 바로 투수를 퇴장시키는 것으로 룰이 바뀌었지만, 위협구 논란은 여전해서 한 시즌에 몇 번씩은 큰 싸움이 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질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몸에 맞을 것을 알면서도 타석에 들어서야 하고, 그것을 알면서도 몸으로 공을 던져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빈볼의 재미있는 점은, 때린 사람이 아니라 맞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타자를 맞춘 투수는 정도에 따라 퇴장을 당하거나, 팬들의 비난을 온몸에 받고, 일이 커지면 구단 차원의 사과까지 이어지만, 타자는 출루하면 끝이다. 얼핏 굉장히 공정해 보이기까지 한 이 게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맞은 사람, 그다음은 맞춘 사람이다.
때린 사람도 피해자가 되는 아이러니는 야구가 그놈의 ‘팀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항전에서 상대편 타자를 일부러 맞춘 투수는 칭찬을 받는다.(WBC에서 이치로를 맞춘 배영수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프로야구에서 상대편 타자를 일부러 맞춘 투수는 상대 팀의 항의와 관중의 욕설을 마운드 위에 홀로 서서 감당해야 한다. 감당한다고 표현한 이유는, 투수 혼자 판단해서 던지는 빈볼은 드물기 때문이다. 경기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WBC에서 이치로를 맞췄던 그 볼도 투수조 고참 구대성의 지시가 있었다.
나는 자꾸 타자를 일부러 맞춰야 하는 투수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누구나 살면서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공을 맞은 타자가 분노해서 내게 달려들고, 상대 팀 덕아웃의 선수들도 내게 달려들고, 성난 관중들은 욕설을 퍼붓고, 방송을 보던 시민들은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려 저 정의롭지 않은 투수를 처벌해 달라고 요청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운드 위에 올라서 상대 타자의 엉덩이를 향해 공을 던져야 하는 순간,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순간, 우리가 흔히 ‘총대 멘다’고 표현하는 그 순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꽤 많은 위협구를, 빈볼을 던졌다. 팀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며, 국가대항전처럼 비교적 안전한 상황에서는 자원해서 빈볼을 던진 적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대가로 무엇을 받았나. 원 팀이라는 안정감과 조직 내에서의 인정? 대단한 부와 명예? 잘 모르겠다. 배영수는 구대성에게 만 엔이라도 받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