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일이 있다. 절대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순간. 예를 들면 <사랑의 하츄핑>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흐른다든지. 웹툰 <네이처맨>을 보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밤거리를 서성인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생기기 마련이다.
한화 이글스는 최하위를 몇 번 했는지 세는 것이 무의미한, 꼴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팀. 감독들의 무덤이다, 프로야구의 수치다, 온갖 폭언을 듣지만 팬들의 사랑은 대단해서, 언제나 시청률과 경기장 매진으로 팀을 아낀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나? 이글스는 올해 전설의 투수 류현진이 돌아오고, FA 영입 선수와 외국인 선수가 폭발하며 7연승으로 화려하게 시즌을 시작했다. 행복한 팬들은 매진 신기록으로 화답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행복해지는구나, 이제 다른 팀 팬들의 비웃음을 듣지 않겠구나 했겠지.
그러나 이글스는 늘 그렇듯 팬들의 사랑에 연패로 대답했고, 기어코 제자리를 찾아 하위권으로 내려갔다. 무기력한 7연패에 빠진 어느 날, 어떤 팬이 관중석에서 스케치북을 들었다. <포기하지 마. 우리도 너네 포기 안 했잖아>라고 쓰여 있는.
만화 <H2>에 ”타임아웃이 없는 경기의 재미를 알려 드리지요“라는 대사가 있다. 야구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것, 뭐 그런 말이다. 낭만적인 말이지만, 만년 꼴찌 팀의 팬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말이다. 얻어맞으면서 끝까지 버텨봐야 결국 지고, 결국 꼴찌 할 건데 타임아웃이 있으나 없으나 무슨 상관인가? 나는 언젠가부터 매사에 그런 식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열심히 해도 결과가 안 좋은데 뭐 하러 안 맞아도 될 매를 맞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패배주의. 이건 다 한화 이글스 때문이다.
그러나 그 스케치북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말하자면 꼴사납게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열심히 해도 어차피 질 테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겠다. 록키는 마지막 벨이 울릴 때까지 링에 서있는 것만으로 인생의 승리자가 되지 않았나? 야구는 타임아웃이 없는 종목이지만, 내일도 내일모레도 경기가 있는 종목이기도 하다.
2018년 한화 이글스가 오랜 암흑기 끝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을 때, 공식 유튜브에는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의 비디오가 한 편 올라왔다. 삽입곡은 정인의 <오르막길>이었다.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 흘러나올 때 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것은 일 년 144경기를 전부 함께하는 것. 오늘 지더라도, 내일 또 경기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도하게 하며, 그리하여 오늘도 포기하지 말자고 되뇌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