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강명구를 생각하라
대학을 갓 졸업하고 스포츠신문사에서 인턴 기자로 근무하던 시절, 나는 딱히 특출 난 점은 없었지만, 한 가지 뛰어난 점이 있었다. 눈치가 빠르고 흉내를 그럴듯하게 잘 냈다. 작곡가로 비유하면 김형석의 감성과 완성도는 없었지만, 박진영의 눈치와 응용력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의 첫 인턴 근무는 아름답지 않게 끝났지만-고성과 협박이 오고 갔다-, 그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게 됐다. 나는 어딜 가도 눈칫발로 사이드에 붙어 있을 뿐, 중심에서 주목받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박진영의 사업 감각과 자기 관리 능력은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언제부터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을까. 스끼다시 인생이라고. 고등학생 때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에서 달빛요정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졸업장에 딱히 메리트가 없는 대학에 들어가서, 수능을 다시 볼까 고민할 때? 군대에 가서도 몸으로 때우는 3D 직군에 배치받아서 결국 무릎이며 허리며 다쳐서 전역했을 때? 아니면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닐까. 모두가 사시미가 될 수는 없으니까. 대부분은 스끼다시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니까.
삼성 라이온즈 주루코치 강명구는 라이온즈에 2차 1순위로 지명받아 10년 넘게 현역으로 뛰다 지도자가 된 그야말로 ‘삼성맨’이다. 프로야구사에 남을 만한 캐릭터도, 성적도 아니지만 2000년대 프로야구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강명구는 ‘삼성 왕조’의 일원이며, 대주자의 전설이다.
9회 말 2사 상황에서 4번 타자가 출루했다. 끝내기 찬스! 승부를 걸어야 하는 순간, 감독이 1루에 있던 4번 타자를 발 빠른 대주자로 교체한다. 이어서 들어선 5번 타자가 4번 연속 파울볼을 치는 10구 승부 끝에, 우중간을 꿰뚫는 2루타를 때려낸다! 배트가 공을 때릴 때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2루로 질주하고 귀루하기를 반복하던 대주자는, 2루타의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달려서 결국 끝내기 득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방송사 중계 카메라는 끝내기 안타를 친 5번 타자와 그에게 달려가 얼싸안는 동료들을 비춘다. 대주자는 그라운드 한편에서 옷에 묻은 흙을 털며 코치와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다.
대주자란 그런 것이다. 대신 뛰는 사람이다. 아마 난 대주자가 될 거야! 하며 야구를 시작하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강명구도 그랬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 프로 구단에 2차 1순위로 지명됐다는 것은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엘리트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중에서 굉장히 성공한 선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프로에 오니 수비 능력은 나쁘지 않았으나 타격이 많이 모자랐고, 발은 굉장히 빨랐다. 자연스럽게 강명구는 대주자 전문 요원이 된다. 타격이 애매한 선수에게는 흔한 코스다.
그러나 강명구는 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주자로 나와서 1안타 21 도루를 하는 사람이었으며, 대주자로 수훈 선수가 되는 사람이며, 한국시리즈에서 대주자로 쐐기 득점을 얻어내는 선수였다. 한 마디로, 대주자로 끝을 본 사람이었다.
가끔 강명구가 삼성 라이온즈가 아닌 다른 팀에 입단했다면, 아니면 강명구가 입단했을 때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선동열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부족한 타격을 메우기 위해 훈련을 하다 정말 이도저도 아닌 선수가 되어 일찍 은퇴했을 것이다. 강명구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주목받지 못하는 아무리 작은 자리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스포츠맨십, 뭐 그런 게 아니라 선택과 집중이었다. 타격으로 승부를 낼 확률보다, 주루로 승부를 낼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 행동에 옮긴 것이며, 철저한 계산으로 완성한 성공 공식이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스끼다시 내 인생, 이라며 자조하는 삶을 살았다.(사실 아직도 가끔 그렇다) 그러나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나는 딱히 화려한 사시미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내가 되고 싶었다. 온전히 나로서 살면서, 빛을 내고 싶었던 것 같다. 이제는 스스로 초라해지는 순간, 눈물이 날락 말락 하는 순간, 나는 이를 악물고 강명구를 생각한다. 난다 긴다 하는 타격 귀신, 수비 귀신들을 제치고 오직 자신의 두 다리로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선수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