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인생인 ‘그깟 공놀이’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서장훈은 프로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다. 프로야구로 치면 선동열이다.(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별명도 ‘국보급 센터’였나 보다. 그런 선수가 자신의 사생활을 소재로 농담을 하는 예능인이 된 것이 농구 팬으로서 달갑지 않을 때도 있지만, (개인적인 취향이다) 선녀 분장을 한 상태에서도 언제나 농구 이야기에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 또 역시 서장훈이야 감탄하게 된다.
그가 했던 가장 인상적인 농구 이야기는, 자신은 단 한 번도 농구를 즐기지 못했다는 것.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고, 자신에게 농구는 전쟁이고 밥벌이였는데 어떻게 즐길 수가 있냐는 말이었다.
콘텐츠 관련 일을 10년째 하고 있다. 첫 회사 입사 최종 면접 때, 면접관은 내게 “일이 좀 사소해 보일 수도 있고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데 잘할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잘할 수 있겠다고 했으니까 붙었을 것이다. 과연 이 일은 자주 소소하고 가끔, 아주 가끔 멋있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다 큰 어른들이 모여서 뽀로로 지난 시즌 한 회차의 줄거리가 잘못됐다며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그런 일인 것이다. 새로 공개한 영화의 자막 싱크가 미세하게 틀어진다며 토요일 새벽에 전화를 받는, 그런 일인 것이다.
가끔 어머니가 너는 무슨 일을 하는 거냐, 물으면 나는 뭐라 설명하려다 포기하고 그냥 비디오가게 점원 같은 거예요, 대답한다. 으뜸과 버금? 어머니가 묻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래도 영화마을 정도는 돼요…라고 대답하는 정도의 일이다.
글쎄, 딱히 내 일이 부끄럽다거나 너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실제로 초등학생 때 나는 비디오가게 사장님을 꿈꿨고, 사춘기 때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끼고 살았으니 적성 따라 잘 가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저 40년 넘게 건설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가 어린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이 공항도, 이 고속도로도 아빠가 지은 거야!라고 말하던 기억이 가끔 나곤 했다. 그러면 어린 나는 우와! 신기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뭐 그런 20세기 감성의 이야기들.
백수 시절의 나는 직장이 아니라 직업을 찾고 있는 거야, 따위의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방구석에 처박히곤 했다. 글쎄 직업이란 게, 업이란 게 뭘까?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일을 즐겨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분명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일이었고, 사춘기 시절부터 막연하게 난 커서 이런 일을 할 거야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데, 생각해 보면 즐거웠던 적이 없다. 서장훈이 들으면 일을 재미로 하냐며 핀잔을 주겠지만 말이다.
한화 이글스 투수 이상규는 지난 주말 두산과의 경기에서 3이닝을 막아내며 승리 투수가 됐다. 1,553일 만의 승리였다.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그는 힘든 시간을 보내며 정말 야구를 하고 싶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말을 잇지 못하며 우는 그의 모습에 이상훈 해설위원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상훈도 투수 출신이기 때문에 알고 있을 것이다. 승리투수가 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이상규 투수는 언제나 야구가 즐거울까? 글쎄, 그렇지는 않았겠지. 2015년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크게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고 1군에 오래 있지도 못했으니 힘든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승리를, 그의 눈물을 보며 나는 문득 잊고 살았던 간절함이 떠올랐다. 야구가 하고 싶었다는 그의 울먹임이, 내게는 계속 살고 싶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깟 공놀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건 절박한 직업이다.
야구 중계가 끝나고, 첫 회사 입사 면접을 보던 날이 생각났다. 일이 사소해 보일 수 있는데 괜찮겠냐고 묻던 그 회사. 그때 나는 너무나 그 회사에 가고 싶어서, 면접 날 아침부터 목욕을 하고, 탈이 날까 봐 아침도 점심도 먹지 않은 채 지하철에서 미친 사람처럼 계속 중얼중얼 연습을 하고, 혹시 일을 그르칠까 봐 면접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간절하게 시작한 일이다. 단 한 번도 사소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 뽀로로 스틸컷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