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있는 존재들
말의 힘은 무섭다. 10년 전쯤인가 우스개 소리로 툭하면 '나는 10년 뒤에 채식 주의자가 될 거야'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나는 10년 뒤에 우주 비행사가 될 거야.' '나는 10년 뒤에 연예인 ㅇㅇㅇ이랑 결혼할 거야.'라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그러니까 나에겐 저 먼 우주만큼이나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때 왜 하고 많은 단어들 중에 '채식주의자'를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어렴풋이 이 단어와 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감지했었나 싶기도 하다. 세상 일엔 우연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현재의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굳이 무슨 '주의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주의主義에 주의注意를 기울이는 순간이 못내 불편한 사람이니까. 채식을 지향하는 사람 정도가 현재 나의 위치이다.
밥상 위에 고기를 조금씩 줄이고 그 빈자리에 채소를 조금 더 많이 올려놓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의 몸을 위해서 시작된 일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 살 때는 공기처럼 중요도를 인식하지 못하던 밥상 위의 나물과 제철요리들이, 혼자 살게 되면서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냈다. 바빠서, 귀찮아서, 비싸서, 할 줄 몰라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밥상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드는 대신, 냉장고를 열어 비닐 포장을 깠다. 싸고, 편하고, 입에 짝 달라붙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마다할 여유가 없었다. 오래도록 그러한 식습관을 이어나갔고, 주위의 사람들이 늘 물었다. '어쩜 그렇게 단 걸 좋아하니?' '왜 그렇게 빵을 많이 먹니?'
내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좋아하니까요.' 그러나 단순히 '좋아한다'라고 여겼던 빵과 비스킷을 의지로 놓지 못한다는 것을 안 뒤에, 몇 번의 눈물 나는 시도와 실패 뒤에 비로소 정답을 알게 되었다. 새삼 깨달았다. 진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한약까지 지어먹으며 빵, 과자와의 결별을 위해 애써본 적도 있는데 정답은 너무나 단순했다. 채소를 먹으라는 것. 아.
조금씩 채소를 씹기 시작했다.
며칠 전, 엄마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커다란 생선 한 마리를 들고 기뻐하는 친척 중 누군가의 모습이었고, 싱크대에는 커다란 생선 한 마리가 눈을 뜨고 죽어있었다. 칼로 찔렀는지 생선 옆에는 핏자국이 보였다. 아, 나는 이제 못 보겠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지만,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 한 토막이 생각난다.
'꼭 저렇게 작은 물고기도 먹어야 해? 불쌍한데.'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마련해주신 양식이잖아.'
흔히 '채식'이라고 하면 '채소만 먹는 식습관'을 일컫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채식주의자는 (때로는 신경질적일 만큼) 채소 섭취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채식을 하지만 이유는 제각각이다. 몸의 건강을 위해 나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채소를 씹은 사람도 있을 테고, 수행이나 다른 여타의 이유 때문에 혹은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기 위해 때로는 영양 불균형도 감수해가며 극단적 채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채식에도 여러 가지 허용범위가 있어서 유제품 섭취를 허용하는 채식도 있고, 육고기는 허용하지 않으나 생선은 허용하는 채식도 있다. 평소에는 채식을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일반식을 하는 등 다양한 채식인들이 있다.
그렇지만 조금만 파고 들어가 보면, 왜 채식주의자들이 고기를 멀리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식탁에 먹음직스러운 때깔과 향기를 풍기며 얌전히 놓여있는 한 덩이 고기의 수난사를 궁금해 한 적 있는지. 물론 여느 사람들처럼 '동물은 인간을 위한 양식'이라는 사고 체계를 갖고 있다면, 굳이 불편하게 고기의 수난사까지 되짚을 필요는 없다. 어떤 환경에서 길러지고, 어떻게 도축되는지. 고기를 빨리 많이 얻기 위해 태어나자마자 동물에게 놓는 각종 호르몬 주사와 약물들. 그리고 채 기절하기도 전에 사지를 절단해버리는 도축 시스템... 지금은 마트 계란 포장지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지만, 내가 5년 전쯤에 '동물 복지'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는 코웃음을 쳤다. 동물 복지? 어차피 잡아먹을 건데 복지라니? 하고.
그렇지만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클릭만 하면 다음날 아침 문 앞에 곱게 놓여있는 먹음직스러운 한 덩이 고깃덩이의 역사를. 고기에 대한 관심은 돼지, 소뿐이 아닌 닭에게로 이어지며, 닭에 대한 관심은 닭이 먹는 모이에게도 가고, 모이에 대한 관심은 모이의 영양분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달걀에게도 가고, 달걀에 대한 관심은 달걀을 사용하는 각종 빵, 과자로 이어진다. 동물복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유전자 조작 식품을 놓고 깊게 고민하게 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발생하고 있는 각종 사회문제와 먹거리가 과연 상관이 없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연말이고, 이리저리 모이는 자리가 많고, 자리에는 고기가 빠지지 않는다. 사회,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채식주의자로 살기가 쉽지 않다. 아직까지 개인보다 집단이 강조되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저 고기 안 먹고 싶습니다!'하고 이 연사 외치기 껄끄럽다. 메뉴 선택지는 기본적으로 고기를 베이스로 하고 있으며, '어느 고기냐'를 선택하는 문제이지 혼자서 훌쩍 다른 범위로 넘어가는 것은 안될 일이다. 어제저녁 회식 자리를 위해서도 열심히 팀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것은 양고기냐, 돼지고기냐, 곰장어냐의 문제였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깨끗한 내 접시 위에 모락모락 김을 내며 올라온 한 점의 양갈비를 향해, 젓가락을 내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우리는 얼굴 있는 것을 먹는 꺼림칙함을 본능적으로 안다. (중략) 우리가 먹는 음식도 한때 얼굴이 있었던 생명이라는 걸 환기해주는 성찰의 효과. 얼굴이 있는 동물들을 마주 보면서 죽이고 먹는다는 것은 사실 웬만한 인간이 정신이 똑바로 든 상태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굉장히 무뎌지고, 마음의 벽이 확고하게 쳐져야...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이기를 잠시 멈추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 <아무튼 비건> 中
좋아하는 어떤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새해를 맞이해 새로운 결심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고. 한 개인의 의지가 얼마나 알량한지, 얼마나 작은 유혹 앞에 쉽게 무너지는지, 알량한 개인으로 여태껏 살아온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새해를 5일 남겨두고 '나 채식주의자가 될래!' 하는 다짐은 차마 못한다. 나는 사회 속에서 사회의 일원으로 사회와 어울릴 것이고, 잘 어우러지기 위해서 개인을 지키려는 그리고 버리는 노력도 할 테니까. 그렇지만 다행히 3개월가량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고, 그동안 잠시나마 채식 주의자로 살아보려 한다. 그러니까 얼굴 있는 존재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연습을 하려 한다. 돼지가 본디부터 삼겹살이 아니고, 닭이 본디부터 다리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얼굴을 거세한 채 나의 편의만 취했다면, 이제는 지웠던 그들의 얼굴을 복기해보려 한다.
이번 주말, 삼계탕 집에서 가족 모임이 잡혀있다. 아직 해를 넘기지 않았다는 핑계로 삼계탕을 맛있게 뜯을지, 새해에 대한 베타 테스트를 진행해볼지, 혼자 조금 긴장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