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케이크
'에디터님, 오늘 안 오세요?'
새해의 공식적인 첫 출근일, 핸드폰으로 날아든 메시지 한 통. 그렇다. 여느 직장인들의 새해 첫 출근일에 나는 집에 있다. (잠시나마) 익숙한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일을 그만둠과 동시에 빡빡해질 살림살이와 한 해동안 몸과 눈물을 바쳐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의 중도 하차 따위를 반년 넘게 고민하다 내린 결정이다. 결정 후에도 몸담고 있던 팀의 상황이 급속도로 변하는 바람에, 삼개월 정도를 더 미룬 후에야 간신히 오늘을 맞았다.
방 안에 혼자 멀금멀금 앉아있다. 무엇을 해야할까. 긴 기다림 끝에 새하얀 빈 노트같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노트를 그저 비워두려 한 건 아니니까. 이 노트를 어떻게 알뜰하게 '채울지'에 대한 고민과 긴장이 고요한 방 안에 가득하다. 채우기 전에 비움의 시간이 절실했으면서도, 몸과 마음은 속도를 쉬이 멈추지 못한다.
'에라, 아침이나 먹을까.'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여유가 있고, 고민의 결과를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여유까지 있다니. 늘 아침이면 알람소리에 용수철 튀어오르듯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 한잔 못마시고 뛰어나가기 바빴다. 나와 별반 다르지않을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시간에 지하철에 몸을 싣고 몸을 부딪혀가며 출근하는 아침. 단 몇 분의 지하철 연착에도 행여 지각할까 신경이 바짝 곤두섰고, 이미 만원 지하철이지만 빽빽한 틈 사이에 한발 먼저 들이밀며 애써 몸을 구겨넣는 내 등에선 식은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잠에서 채 깨지도 못했는데 몸과 몸 사이에 끼어 납작 눌리는 내 몸도 가련하지만, 하루의 시작을 늘 이렇게 맞이하는 마음에는 참혹함이 있었다.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살 빼고 싶으면 지하철 출퇴근 2주만 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지하철 출근은 내게 가혹했다.
'그래, 오늘은 기타를 고치러 가자.'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 기타를 배운지 한달 째이지만, 가지고 있던 기타를 고치지 못해 연습할 수가 없으니 진도는 늘 제자리 걸음. 더이상은 미룰 수 없을 것 같아 기타를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겨울아침 공기가 상큼하다.
출근방향과 반대로 뚜벅뚜벅 걸었다. 날씨는 맑고 내 걸음은 느릿한데 마음이 계속 쿵쾅거렸다. 이상할 정도다. 평소 출근할 때는 마음이 쿵쾅거리는게 당연했다. 집 앞에서 지하철 역까지 가는 버스를 놓칠까봐, 인파에 떠밀려 이번에도 지하철을 놓칠까봐, 14층 건물에 단 세대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를 놓칠까봐, 그래서 또 지각에 대한 시말서를 쓰게 될까봐. 쿵,쾅,쿵,쾅. 무사히 출근하고 나면 백미터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온몸이 지쳤다. 그런데 지금은 왜? 새해가 밝았고 겨울답지않게 포근한 오늘이고 난 그놈의 지하철을 더 이상 타지 않아도 되는데. 진정해라, 진정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설다.
회사를 쉬면 외국 가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희한하게 외국에서는 모든 풍경이 슬로우 모션이었으니까, 햇살도 바람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내게 포착되었으니까 외국가면 모든게 괜찮아질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이 미친 속도도 잠재울 수 있을거라고. 그런데 나는 한낮의 우리동네 한복판에 서서, 눈앞의 생경한 풍경에 넋을 놓고 서있다. '여기가 어디지?'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 우리동네인데, 그런데 여기가 어딜까.
그동안 몸이 바빠서 마음이 덩달아 바쁜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내 마음은 몸과 상관없이 그저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홀로 폭주중이었다. 시간을 빨리 살면서 시간이 빨리간다고 투덜거렸다. 그간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
음악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 음악 청년처럼, 한쪽 어깨에 기타를 둘러메고 한낮의 풍경 속을 탐험했다. 꼬박 2년을 침묵하던 기타를 고치고, 중고책방에 들러 동물권에 대한 책도 몇 권 구입하고, 궁금하던 떡집과 빵집을 어슬렁거렸다. 질주하던 마음의 속도가 차차 잦아든다. 마음에 스며든 빈 칸 사이로 '집에 돌아가면 치즈케이크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둥실 떠올랐다.
치즈케이크는 절대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몸과 마음 둘 모두 여백이 없으면 구울 수 없는 케이크다. 요거트, 버터, 크림치즈를 섞고 계란 흰자를 풍성하게 거품내어 올리는 과정에서 이미 발생하는 설거지가 한 가득인데다 만든 후 반드시 하루 이상의 숙성시간이 필요하기에, 문득신선한 치즈케이크 한 조각이 절실하다가도 공정의 번거로움과 숙성에 필요한 시간을 떠올려보면 고개를 젓게된다. 그래서 내게 치즈케이크의 꽃말(?)은 '나 비로소 한가해요'다.
천천히, 찬찬히 치즈케이크를 만드는 밤. 계란의 흰 자와 노른자를 분리하고, 밀가루를 체치고, 반죽을 부드럽게 휘젓는다. 치즈케이크가 구워지는 시간도, 최고로 맛있는 치즈케이크를 위해 즐겁게 기다릴 수 있는 하루 정도의 여유도 내게 있다. 치즈케이크를 기꺼이 굽는 밤을 많이 가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