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백 순두부
"뜨거운 물 괜찮으시죠?"
얼굴의 절반 이상을 덮는 시커먼 마스크를 쓰고 식당 안으로 들어선 나를 보며 아주머니가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아주머니가 건넨 물컵의 온기 덕분에 추위에 바짝 얼었던 몸이 순식간에 누그러진다. 아니다, 아주머니의 말에 담긴 온기 덕분이지 싶다. 뜨끈한 물컵을 건네받기도 전에 이미 나는 따뜻해졌으니까.
시청 부근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일부러 이 곳에 꼭 들린다. 을지로 입구역 2번 출구 지하상가에 있는 '깡장집'이라는 식당이다. 여기는 누구나 엄지를 치켜드는 이름난 맛집도 아니고,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는 이 집만의 독특한 메뉴가 있는 것도 아닌, 어깨를 잇대고 즐비하게 늘어선 수많은 지하상가 식당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를 정말로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느냐면 굳이 식사 때가 아닌 시간이라도 근처에 볼일이 있으면, 일부러 들를 정도로 좋아한다. 식사 후에 또 들러 이미 부른 배를 부여잡고 두 번째 식사를 한 일도 적지 않다.
앞에서 이 곳을 여느 지하상가 식당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식당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 식당에는 그저 그런 이 곳을 유일하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나도 그 매력에 빠져 몇 년째 발길을 끊지 못하고 있는 거고. 바로 추운 겨울, 손님에게 따끈한 물 한잔을 내줄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아주머니 덕분. 나는 여기를, 정확히는 아주머니가 있는 여기를 그래서 정말로 좋아한다.
'물 안 내주는 식당도 있나?'
으레 식당이라면 손님에게 내오는 물 한잔을 가지고 이리 호들갑이냐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내가 아주머니의 매력에 빠진 연유는 이러하다. 몇 년 전 여름, 시청 부근에서 미팅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하게 되었다. 주변을 기웃거리다 손님이 아무도 없는 텅 빈 식당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오후 세 시경이었을 거다. 테이블에 수저를 수북이 쌓아놓고 닦고 있던 아주머니가 몸을 돌려 나를 맞았다.
"어서 들어오세요."
나는 눈을, 아니 귀를 의심했다. 아주머니의 미모도 미모지만 목소리가 너무 고왔다. 사람의 목소리, 더군다나 여성의 목소리에 반한 적은 살면서 한 번도 없었는데 아주머니에게 계속 말을 붙여보고 싶을 정도로 목소리가 고왔다. 아나운서 출신이신가? 아나운서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해야 되지 않을까?속으로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대한 감탄사를 쏟아내며, 메뉴판을 한번 훑어보고 백 순두부를 주문했다. 곧 여러 밑반찬과 함께 보글보글 끓고 있는 백 순두부가 나왔다.
"백 순두부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크흐. 별 기대 없이 한 숟갈 떠 넣은 백 순두부는 의외로 맛이 좋았다. 이 집 뜨끈한 백 순두부 맛의 비결은 아주머니 목소리를 끼얹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았다.
나는 백 순두부를 퍼먹으며 아주머니를 흘끔흘끔 곁눈질로 바라봤다. 그녀를 향한 나의 눈동자가 너무나 반짝거렸기에, 내가 남자였다면 사연 있는 과거의 첫사랑이나 지극한 짝사랑으로 몰렸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늦은 식사를 하는 손님들이 드문드문 들어왔다. 아주머니가 그 고운 목소리로 손님들을 맞았다. 장삿속으로 곱게 지어내는 목소리가 아닌, 기품과 다정함이 깃든 목소리. 당신이 나에게 건넨 물 한잔처럼 그렇게 따끈한 온기를 품은 목소리. 그 목소리가 식당에 들어서는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살갑게 감싸 안았다. 아주머니를 관찰(?)한 결과, 그녀는 메뉴 주문을 받을 때도 손님 눈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았다. 홀로 와서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앉은 할아버지에게 ' 여기는 바람이 차요, 저기로 앉으세요.' 하고 4인석을 내어주는 넉넉한 마음을 바라보았다.
그날로 아주머니에게 반했다.
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이런저런 볼일을 보고 나면 늘 깡장집에는 식사 때가 아닌 애매한 시간에 들리게 됐다. '에이, 밥도 먹었는데 뭘 또.' 싶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잠든 김유신을 태워 유곽으로 안내한 충직한 말처럼 내 발이 나를 태우고 당도한 곳은 늘 깡장집 앞이다. "어서 오세요." 아주머니의 환한 웃음과 목소리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자동으로 주문을 외울 수밖에. "백 순두부 하나 주세요."
여느 때처럼 아주머니가 살갑게 따순 물을 내주고는 꼿꼿이 앉아 책을 참 열심히도 읽는 날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예뻐서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다- 신고하지 마세요!- 저 낭랑한 목소리로, 책 읽어주는 라디오 방송을 하시면 참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읽는 책이 무슨 책인지 궁금했던 게 나만은 아닌 모양인지, 잠시 한가해진 주방 아주머니도 나와서 읽고 있던 책을 물었다. 이 책은 이런 내용인데, 어떤 부분에는 공감이 가고 또 어떤 부분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며 두 분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또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계산하고 나가면서 아주머니에게 읽고 계신 책이 무어냐고 물었다. 일본 저자가 쓴 책으로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극한 팬심으로 아주머니의 말은 아직도 기억한다. 아주머니는 최근에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읽고 와 닿은 바가 있어, 이 책도 읽고 있다고 며 살림을 늘리면서 관리에 시간을 쓸 바에 남편과 놀러 다니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더 가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더 잘 살고 싶다는 아주머니의 예쁜 바람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읽어보겠다고 이야기하고 나왔다. 물론 책 제목을 잊어버려서 읽을 수 없지만.
다음에 들를 땐, 아주머니에게 책 한 권 선물해야겠다는 마음이 벌써 해를 넘겼다. 김창완 아저씨의 책을 드리기로 이미 점찍어 두었는데 아직까지 드리지 못했다. 다음번 방문 땐 꼭 선물을 드리고 와야지.